김희애..재력가 남편인 줄 알았더니… 결국 빈손으로…

우아한 배우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김희애입니다. 그녀는 1983년 데뷔 이후 무려 36년간 정상의 자리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연기력 또한 좋아 원로 배우 이순재가 연기를 가장 잘하는 후배로 그녀를 언급했었습니다. 고두심 역시 김희애를 언급하기를 “연기하는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 그 자체다 그래서 때로는 얄미워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드라마를 꼭 잡고 있는 김수현 작가조차 대본 리딩 때 그녀의 절절한 연기로 눈물을 쏙 빼놓은 일이 많았으며 그래서 김수현 역시 그녀를 향해 자신의 대본을 이렇게 완벽히 소화한 배우는 김희애 밖에 없다며 그녀를 치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김희애라고 하면 따라오는 수식어가 우아한 배우 최고의 연기자 등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정작 인간 김희애의 삶은 배우로서의 탄탄한 삶과 달리 불안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한때 톱스타로서 주인공만 하다가 갑자기 결혼이라는 도피를 선택하며 엄청난 재력가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IMF 때 남편이 매국노로 몰리며 회사에서 물러나게 되자, 다시는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아 “내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라는 생각까지 하며 현재까지도 남편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 김희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김희애 데뷔 비하인드

1967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희애는 어릴 적부터 엄마 친구분들이나 어른들로부터 “아이고 예쁘다”| 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란 덕분에 스스로도 본인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해 당시 길을 걸을 때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아한 이미지와 달리 학창 시절의 그녀는 굉장히 잘 놀았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한 번은 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술을 너무 많이 먹어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김희애, 그녀는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학창 시절을 젠병이라고 고백할 만큼 당시만 하더라도 배우라는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믿어지지 않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때마침 교복 자율화가 실시되면서 방송에서는 기성복 광고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런데 당시 학교 선생님의 동생이 광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 우연치 않게 캐스팅되어 고등학교 1학년인 1982년 제일모직 의류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 첫 출연료로 당시로서는 꽤나 큰 돈이었던 15만 원을 받았는데 그러자 부모님도 어린 딸이 돈을 벌어 오니까 딸의 연예계 활동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우연처럼 찾아든 단 한 번의 기회가 그녀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운명이 됐던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 불과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영화 “스무해 첫째 날”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하이틴 영화에서 주로 활동하며 그 시절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80년대를 대표하는 하이틴 스타로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김희애 스타로의 발돋움

대학교 1학년 시절 KBS 특채 탤런트로 데뷔하게 되면서 몇 년간은 KBS에서 맹활약하게 되었고 그런데 이때 그녀는 KBS 소속 탤런트였음에도 MBC에 가끔씩 얼굴을 비추더니 1990년 KBS 사태를 기점으로 이후 MBC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당시 하희라, 채시라 등과 함께 MBC 간판 탤런트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MBC로 이적한 후로는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KBS 드라마를 압도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상승 가도를 달리게 되었고 그래서 89년 MBC 연기대상에서는 당대 최고의 톱스타 원미경과 대상 후보로 선정돼 그녀는 여자 최우수상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다 1992년에는 한국 드라마 사상 역대 시청률 7위를 차지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이후남 역을 맡아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대에 독립적이면서도 역경을 헤쳐나가는 기존 한국 드라마에 없던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며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그녀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던 백일섭은 일찍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채고 훗날 2016년 한 인터뷰에서 현존에 있는 여배우 중 김희애만큼 잘하는 배우가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아들과 딸을 촬영할 때부터 장차 최고의 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하이틴 스타로 시작해 아들과 딸을 통해 연기력까지 인정받아 이후부터는 최진실, 채시라와 함께 1990년대 TV 트로이카를 형성하는 여배우들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고 그러다 1993년에는 최진실과 함께 출연한 폭풍의 계절에서 또 한 번 훌륭한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으며 그의 MBC 방송대상 백상예술대상에서 마침내 대상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남편 이찬진과 첫 만남

김희애 그녀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목마름 같은 것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최고의 위치에서 뜻밖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바로 서울대 출신 남편 이찬진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이찬진은 국민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한글과 컴퓨터라는 기업의 초대 사장으로 지냈으며 또한 1996년에는 16대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에도 당선돼 국회의원을 지낸 경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남편이 한참 잘나가던 1996년 최고의 인기 탤런트 김희애와 만나면서 덩달아 그녀의 남편도 큰 화제가 되었고 그리고 참고로 김희애와 연애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는지 김희애를 만나기 전 낸 책을 보면 본인이 한 번도 연애를 못 해보고 애인도 못 사귀어보고 일만 했다는 등의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찬진을 그녀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바로 김희애의 형부였는데 당시 형부가 서울대 출신으로 평소 눈여겨보던 후배 이찬진을 처제에게 소개해주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김희애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좋더고 하더라도 천상 연예인이다 보니 외모를 좀 많이 보는 편이었고 그런데 당시 형부가 그녀에게 대학 후배인데 컴퓨터를 아주 잘 아는 친구다 라고 하자 이 정도만 알고 나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시 두 사람은 비가 오는 날에 소개팅을 했는데 남편의 첫인상은 구두 밑창이 다 떨어지고 양말도 비에 젖어 마룻바닥에는 온통 양말 자국이 생기고 말았고 그래서 이게 좋게 말하면 검소한 거지만 솔직히 당시 남편은 옷도 너무 못 입고 완전 별로였다고 했습니다.

김희애 결혼 결심 이유

이처럼 형부의 소개로 만나긴 했지만 남편의 촌스러운 외모와 더불어 여러 가지들로 인해 첫 인상이 좋지 않았고 하지만 이후 그녀는 남편에 대해 하나의 계기를 통해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짧고 간결한 메일 답장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이 막 보급이 되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랐고 그래서 평소 김희애 그녀도 방송에서 종종 자신이 컴맹이라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남편에게 이메일 보내는 방법을 배우고 그때는 보낼 사람이 없어서 남편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몇 시간 후에 답장이 정말 짧게 왔는데 그런데 그 짧은 메일의 내용이 그녀에게는 굉장히 샤프하고 멋있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찬진 역시 김희애에게 푹 빠져 당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데 “평소 같이 있으면 편안한 여자 그리고 상대를 설득할 줄도 알고 설득당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을 이상적인 결혼 상대자로 생각을 해 왔어요. 하지만 주위에서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너는 그러다가 평생 장가 못 간다고들 놀려댔는데 하지만 김희애 씨를 만나면서 이 여자가 바로 그 여자다 싶었어요”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은 당시 붐이 일었던 컴퓨터에 대해 김희애가 이찬진으로부터 배우면서 점차 사랑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고 그런데 두 사람이 순수한 건지 짧은 연애 기간 동안 여러 가지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만난 지 한 달 만의 일로 두 사람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이찬진이 계산을 하면서 사인을 하는데 서명란에 이찬진이라고 이름 석자를 쓰는 걸 보고 이때까지 남편의 이름을 창진으로 알던 김희애는 이름이 찬진인 걸 알고 깜짝 놀라 정말 찬진이냐며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할 때 항상 집에 데려다 주는 쪽은 남편이 아니라 김희애였는데 왜냐하면 당신 남편은 운전면허증만 있지 주로 택시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라 운전을 잘 못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데이트가 끝나면 늘 김희애가 이찬진이 살던 대방동 집까지 바라다주고 방배동 본인의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연애 방식은 보통의 남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다가 하루는 이찬진이 느닷없이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게 되는데 훗날 김희애의 고백에 따르면 남편이 믿도 끝도 없이 내게 다이아몬드 반지는 받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말을 했고 그런데 그게 바로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였던 것이었다.

솔직히 남들처럼 근사한 말을 기대했건만 프러포즈 치고는 너무 이상했다고 했습니다. 어찌 됐든 그녀는 이런 이상한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1996년 9월 만난 지 불과 4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고 또한 훗날 그녀가 한 토크쇼에서 고백하기로는 본인이 30살 때 결혼을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여배우에게 있어 서른 살이란 주인공에서 내려와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결혼이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남편 회사의 부도 그 이후

아무튼 당시 그녀는 한국의 빌게이츠라 불리던 벤처 사업가 남편 이찬진과 결혼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하지만 안타깝게도 IMF가 닥쳐오면서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더니 그녀의 남편 회사 한컴 역시 경영 악화로 부도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1998년 5월 남편의 회사는 1차 부도가 났고 그런데 이때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전 세계 워드 프로세스 시장을 장악했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한글 때문에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하자 귀가 솔깃한 제안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한글과 컴퓨터를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넘기고 약 2천만 달러의 투자를 받기로 한 것이었는데 2천만 달러면 지금의 돈으로 264억 정도로 당시 환율과 은행 이자가 극히 나았기에 실질적인 가치는 800억 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대중들은 한글과 컴퓨터를 미국에 넘길 수 없다며 여기저기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그녀의 남편 이찬진이 매국노라고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 너무나도 많은 한국의 알짜 기업들이 IMF로 인해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매각되는 광경을 보던 국민들의 불안감과 분노가 이 사건에도 몰렸기 때문인데 아무튼 당시 그녀의 남편 사건은 9시 뉴스에도 보도가 될 정도로 사회적인 파장이 굉장히 컸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그녀의 남편은 사실상 거의 빈손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고 그리고 당시 그녀가 결혼할 때만 해도 김희애가 엄청난 재력가와 결혼한다 남편이 200억대 주식 부자다 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남편 이찬진는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명성만큼 그렇게 큰 재산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한글과 컴퓨터에서 쫓겨 아니 물러난 그녀의 남편은 이후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위해 현재 네이버와 같은 포털 사이트 드림위즈를 만들었고 하지만 이때도 남편의 회사는 네이버, 다음 등에게 밀리면서 회사의 앞날이 심각하게 불투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희애의 공백 그리고 재기

그리고 이때 김희애는 톱스타로 지내다가 평범한 주부가 되어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고 육아까지 하다 보니 더 이상은 자신이 여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당시 그녀가 생각하기를 다시는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아 내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결핍되고 궁지로 몰렸을 때 다시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녀 역시 이 시기를 계기로 그건 본인이 했던 배우 활동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일인지 깨닫고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잠시 떠나 있던 그녀가 결혼 7년 만에 다시 연예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복귀가 두려웠던 게 무색할 만큼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모두 대박이 나며 브라운관 복귀를 완벽히 성공했고 그리고 이때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인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만 세 편 연속으로 출연하게 되는데 그래서 한때 김희애가 김수현 사단의 핵심 멤버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김희애는 신인 시절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서 1985년 김수현 작가의 작품 부모님전상서 오디션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후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러브콜이 없자 김수현 작가님은 나를 안 좋아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7년 만에 다시 연예계로 복귀하고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만 연달아 세 번 출연하게 되자 한 번은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용기를 내 “선생님 그때 왜 저 안 불러주셨어요.”라고 물어봤더니 김수현 작가가 말하기에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 만났다면 짧게 만나고 헤어졌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김수현 작가의 작품으로 2000년도에도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킬 수 있었던 그녀는 이후에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에도 출연해 배우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모습과 더불어 배려심과 현명함이 큰 화제가 되더니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결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김희애 재산

이처럼 김희애 그녀는 40년이 가까울 만큼 정상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다 보니 여느 톱스타들처럼 재산이 상당한데 알려진 그녀의 재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강남구 청담동의 주차장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걸 2006년도에 119억 원에 매입을 했으며 월 4천만 원 내외의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의 토지 면적은 약 200평으로 시세는 약 30억 내외로 추정이 되고 있으며 그리고 김희애가 처음 이곳을 매입할 당시의 금액보다 현재는 건물의 가치가 대략 3배 가량의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김희애와 남편이 한때 살았던 압구정동 고급 빌라는 청담 초중고가 위치하고 최고의 학군의 입지를 자랑하는 청단 8억원은 2차 빌라였는데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 전부터 35억원 가량 하는 빌라였고 허나 지금은 대한민국 아파트의 상징 최근 실거래가 80억원까지 기록한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에서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

마지막으로 김희애가 고백하길 내가 데뷔한 지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그간 정말 치열하게 나 자신을 달려내왔다 내가 데뷔했을 때 연예계가 지금과 다르게 시행착오가 많았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요즘이야 어릴 때부터 연예계 생활에 대해 알려주고 보호도 해주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에 힘든 고생을 다 겪고 지금의 위치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 정말 많은 위로를 해주고 싶다. 아무튼 이후 일이 잘 풀려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갑자기 결혼을 하면서 7년 가까이 공백기가 있었는데 늘 주목받고 화려한 삶을 살다가 평범한 주부로서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고 키우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뭔가 여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더라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고 심지어 내 인생도 여기서 끝이구나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시간들이 아마 8년 정도 됐던 것 같아 하지만 지금 와서 그 시기를 돌이켜보면 무엇이든 결핍되고 궁지로 몰렸을 때 다시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그때 골방에 갇혀 혼자 있던 시간들이 나의 일을 더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들었고 또한 내가 했던 사회 활동이 얼마나 값어치 있었는지 그 시간들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을 했는데 정말 그때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거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대로 내가 서른 살에 결혼을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여배우의 서른 살은 주인공만 하더라도 이제는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는 나이였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있어 결혼은 하나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과 결혼 후 혼자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하지만 여느 부부들처럼 결혼 생활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바로 하지 않고 많이 참는 편으로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걸 남편이 이걸 미리 좀 알고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데 하지만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나중에 이것 때문에 섭섭했다고 하면 그걸 왜 이제 얘기하냐 말을 안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더라 그리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우리 남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남편이 요즘 뭘 하는지 알아보려고 남편의 SNS에 들어가 봤으며 업계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뭔 소린지 하나도 몰라서 바로 나왔다 그래서 그때 깨달은 게 부부는 서로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좋은 것 같다.

남편도 내가 SNS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는 보지 말라고 하더라 사실 나도 촬영장에 가족이 와 있으면 위축된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그날 이후로는 각자의 영역에 대해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 스스로가 바쁘게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숙제를 정해놓고 그걸 하나씩 완수하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치러내며 살아왔다 물론 어쩔 땐 왜 이렇게 고단하게 살지 싶다가도 나태해지면 내 머리도 산뜻해지지 않더라 그렇게 내 식대로 숙제를 하며 살다 보니 그게 뭐요 십 년이 되고 내 인생이 되더라 그리고 나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뻔한 대답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행복은 뭐니뭐니해도 가족이 건강할 때다. 그리고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꼽자면 자기 전 할 일을 싹 마치고 씻은 뒤에 자려고 누웠을 때다. 혹은 내가 만든 간단한 음식과 함께 혼수라거나 남편과 와인 한잔 하면서 얘기 나누는 것도 정말 즐겁다 사실 행복은 별것 아닌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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