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상을 떠난 송해를 시작으로 연예계의 큰 어른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 대중들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가수 현미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나훈아는 깊은 슬픔과 후회를 느끼며, 현미를 잃은 슬픔에 음식도 전혀 먹지 못하고 울었다고 전해졌습니다. 나훈아와 현미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으며, 함께 음악 활동을 하면서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이에 나훈아는 현미의 별세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친구를 잃은 슬픔과 함께 현미에게 늦게라도 전하지 못한 말과 감정에 대한 후회가 쌓여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현미는 지난 4일 오전 9시 30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쓰러져 숨졌습니다.
쓰러져 있던 현미를 팬클럽 회장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현미는 두 아들과 더불어 노사연과 한상진이라는 조카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영곤은 현미의 첫째 아들로, 곤이라는 가수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 이영주는 가수 원준이의 남편이기도 합니다.
현미는 가족을 아끼며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미의 별세는 가족들 뿐 아니라 팬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미는 그동안 첫째 아들 이영곤의 가수 생활을 후원하기 위해 6억 원대의 대출까지 투자하며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영곤은 무명 가수로의 생활 끝에 현재 미국에서 부동산 일을 하고 있다고 전해졌습니다.
배우 한상진은 이모인 현미의 별세 소식을 듣고 급히 미국에서 귀국할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다고 전해졌습니다. 현미의 가족들과 동료들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슬픔과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현미를 추억하고 그녀가 생전에 베풀었던 사랑과 따뜻함을 기억할 것입니다. 한상진은 언론에 이모가 어제까지 건강했다고 전했습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지방 공연도 다녀왔는데, 갑작스럽게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현미를 추억하는 후배 가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는 인성이 훌륭해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미의 음악과 인생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줬으며, 그녀의 삶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현미는 한명숙의 어려운 처지를 듣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한명숙은 현미 씨가 떠나기 전까지 계속 전화를 주시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한명숙은 현미 씨를 어디에서나 응원해왔다며 현미의 따뜻한 마음을 감동적으로 전했습니다. 이를 통해 현미는 훌륭한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매우 존경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미와 한명숙이 힘든 시기를 겪은 것은 당시 가수들의 고용 형태가 불안정하고 자산 관리를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 가수들도 큰 돈을 벌기 어려웠고, 재산을 잘 관리하지 못한 채 남편의 사기 등으로 인해 많은 가수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현미와 한명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고, 그들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감동받은 한명숙은 현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녀와 다시 연락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위로하는 일도 자주 했습니다.
퇴원한 후에 전화를 했더니 허리가 아파서 밥도 못 차려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한명숙처럼 혼자 사는 사람이지만 건강해서 가끔씩 한명숙의 집에 들러 음식을 챙겨주고 밥도 해주곤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노쇠해진 한명숙의 모습을 보고 제작진에게 촬영 거부를 요청해 오디오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한명숙을 기억하는 분들이 가슴 아파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날 현미는 한명숙의 간병인에게 먹을 것을 몰라서 음식을 못 챙겼다고 했습니다. 대신 돈이라도 가져왔으니 한명숙이 좋아하는 것 좀 챙겨주셨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명숙은 현미를 걱정하며, 현미야 너도 돈이 없다는 거 알아.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할 필요 없어라고 대답했습니다. 한명숙의 말에 현미는 돈이 없어서 10만 원밖에 못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현관문을 나선 현미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한명숙이 이렇게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며 울었습니다.
현미 아니면 다른 여자는 필요 없다고 말한 이봉조는 현미를 잃고 평생 그리움을 살았습니다. 현미는 그 잘생긴 남편이 말라가며 나한테 불쌍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더라.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너가 안 받아줄 거냐라며 말했습니다. 이봉조와 다시 살려고 했지만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미는 운명이 그렇게 됐나 봐요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현미는 이봉조가 당뇨로 인해 이가 빠져 틀니를 끼고 섹소폰을 불 때 그 자리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현미의 두 아들은 이봉주의 호적에 올라가지 못해 재산 상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봉주와 그의 본처 묘를 합장하며 명복을 빌어줬다는 사실은 현미의 인자한 성품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나훈아는 현미의 사망 소식에 슬프고 후회되는 마음을 전하며, 왜 누나라고 불러야 했는지 말했습니다. 현미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고, 항상 나를 예뻐해 주셨던 분이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미 누님을 단 한 번도 누나라고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나의 태도에 현미 누님이 왜 누나라고 안 부르냐며 질책한 적이 있었다고 나훈아는 회상했습니다. 나훈아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한 배 속에서 나왔나요?
연애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뭘 누나라고 불러요라고 당돌하게 말했을 때, 현미 누님은 놀라면서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누님도 남자들한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설레었던 말이라고 웃기까지 하셨다고 해요. 사실 나훈아는 다른 선배 여가수들에게는 누나라고 종종 부르며 예의를 지켰지만, 현미 누님의 노래를 너무 좋아했고 매력적인 분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연애도 할 수 있는 나이라며 후배처럼 보이기만 싫어 당돌하게 말했던 것이라고 나훈아는 현미를 흠모해 왔던 속마음을 털어놨습니다.
한국 전쟁 도중 일사 후퇴 당시 평안남도로 피난 갔던 현미는, 20살 때 주한 미 8군 무대에 선 경험을 시작으로 연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작곡가 고 이봉주와 사귀다가 결혼한 후, 1962년에 발표한 ‘밤안개’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후에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현미의 시신은 싱크대 앞에서 발견되었고, 발견 당시에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사망 원인은 골다공증으로 추정되었으나, 이후 심장마비로 밝혀졌습니다. 이 분은 2021년에 크게 넘어져 골절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