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롯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트롯 신동 김다현의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김다현은 mbn 특종 세상에 출연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는데요.
김다현은 미스트롯에서 아이답지 않은 뛰어난 노래 솜씨와 귀여운 외모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후로도 예쁘고 밝은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지만, 환한 모습 뒤에 감춰진 김다현과 가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너무나 처참한 고생 그 자체였습니다.
김다현의 아버지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찢어지는 가난으로 슬픔에 울부짖었고, 이후 수십억의 빚까지 지는 바람에 어린 딸 김다현이 집안에 가장 노릇을 해왔지만, 그녀 역시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코피까지 흘리는 등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는데요.
올해 열다섯 살인 김다현의 아버지는 잘 알려진 대로 청학동 출신의 훈장 김봉곤인데, 그는 산골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서당을 운영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토록 유명한 서당이니 돈을 잘 벌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방학 때만 고작 30~40명의 어린이들이 들어찰 뿐, 나머지 기간에는 오는 이가 없어 수입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는 과거 서당을 짓느라 은행 빚만 25억이나 되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가, 돈이 부족해 상환 날짜를 끝내 지키지 못하고 몇 번 연체가 되었더니, 나중에는 대출이 거절되어, 한때 이자가 25%나 되는 제2금융권 캐피탈 돈까지 빌려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는데요.
힘겹게 연명을 해오던 서당 사업은 코로나가 닥치는 바람에 최근 3년간은 아예 운영조차 할 수 없었는데 김봉곤은 사실 어릴 적 경남 하동군 청학동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던 시절부터 이미 가난으로 인한 생활고와 싸우며 너무나 힘겨운 나날들을 보냈었다고 합니다.
지리산 산골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던 김봉곤은, 전통을 고수하는 청학동의 특성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는 등 제도권 교육을 받아보지 못하고, 서당 등 자체 교육을 따라야 했으며, 또한 어린 시절 먹고 살기 위해선 보리 고개를 반드시 겪어야 했다고도 밝힌 적이 있었는데요.
김봉곤은 과거 한 방송에서 어린 시절 해발 900미터 지리산에서 살았다. 그때 보릿고개도 겪었다.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열일곱 살의 청악동을 떠나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가슴 아픈 과거사를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시골 청년이 낯설고 복잡한 서울에 오니 뭘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지만, 그는 서빙, 청소, 노숙 등 온갖 고생을 한 끝에, 90년대 당시 댕기머리 청년으로 방송을 타며 이름이 알려졌고, 후에 결혼해 1남 3녀를 낳으며 서당 사업으로 생계를 꾸리며 살아왔는데요.
사실 김봉곤의 나이 열다섯 살 때까지만 해도 청학동은 문명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 뒤 길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몰리기 시작해, 80년대 말부터는 청학동이 현대화가 되었고, 90년대 초에 김봉곤이 청학동 훈장으로 방송해 소개가 되자, 방송 3사에서는 경쟁적으로 그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을 만들게 되어, 그는 눈을 떠보니 너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기 청악동은 현대적으로 변하더니, 어느 날 동동주와 부침개를 팔고, 민박집도 들어서는 등, 한마디로 관광지로 변해버리고 말았다는데요. 게다가 김봉곤이 서당으로 겨우 먹고 살만해지자, 청학동 서당 콘셉트이 돈이 된다 싶었는지, 상당수 교육 사업가들이 청학동 브랜드를 대량 복제하기 시작했고, 유사 서당들과 유사 김봉곤이 20여 개나 생겨 난립하면서, 과잉 공급된 서당 간의 과잉 경쟁이 일어나는 등, 점차 청학동 서당의 권위에도 흠집이 생기기 시작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김봉곤도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게 됩니다.
그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하동군수를 찾아가 청학동 서당이 대한민국 대한 교육의 1번지니까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며 어필도 해봤지만, 지자체는 별 반응이 없었고, 결국 계란에 바위치기라고 느끼고 청악동을 떠나 강원도에 터를 잡고 서당을 건립하게 되는데요.
이때 그는 무려 25억이나 되는 은행 빚의 제2금융권의 고금리 대출에까지도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크게 지었던 서당 건물이 청소년 수련원 인가가 나지 않아 김봉곤을 상당히 난처하게 만들었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추운 겨울에 훈장과 악동들이라는 다큐 영화도 직접 촬영하고 감독해 제작해서 히트 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 실패를 한 후, 현재는 충북 진천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 김봉곤은 피나는 고생을 해왔지만, 사실 그의 노력 뒤에는 부인과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도 많이 있었는데요.
남편이 서당을 운영하면, 부인 서혜란 씨는 전국에서 온 아이들을 일일이 케어하며 뒤치닥거리를 해야 했고, 어느 겨울날에는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추위에 떨어야 했지만, 견적을 보러 온 보일러 기사는 보일러 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단열 문제가 있어 공사비가 1300만 원이나 나온다는 이야기를 해, 김봉곤 가족들의 시름을 깊어지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김봉곤은 한옥이니까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아궁이를 뜨고 텐트에서 지내면 된다고 했지만, 부인은 매년 문제가 돼서 다툼이 있었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되냐며, 또 겨울을 이대로 지내보자는 거냐라고 하니까 참고 살지 다른 여자 같았으면 진작에 도망갔다 돈 없으면 서당 팔아서 아파트로 이사 가자며 화를 내기도 했었는데요.
가족들에게 풍족한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은 게 이 세상 모든 가장들의 똑같은 마음일 텐데 아궁이를 떼고 텐트에서 지내자는 말을 해야만 했던 김봉곤도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는 코로나로 서당 사업이 중단되어 수입이 제로가 되었고, 결국 은행에 대출을 알아보러 갔지만, 과거 대출 연체 이력이 있었던 데다가 수입원이 없다 보니 소득 증빙 자료를 제출하지 못해 결국 대출 거절을 당하게 되는데요.
결국 김봉곤은 아내와 상의 끝에 갖고 있던 카메라와 결혼 반지를 팔기로 했지만, 카메라는 판매가가 200만 원밖에 되지 않았고, 반지 일곱 개도 다 합쳐 고작 80만 5천 원이라는 이야기에, 팔지 않기로 약속했던 자녀들의 돌반지까지 아내 몰래 가져와 감정을 받게 됩니다.
아이들의 돌반지는 399만 원이라는 감정이 나왔지만, 아내는 약속을 어기고 반지를 팔 생각을 한 남편에게 화를 내며, 다른 집은 애들 태어나자마자 애들 명의로 적금도 꾸준히 들어서 결혼할 때 미천 삼아 집도 없고 자금도 해준다는데 우리가 그런 걸 준비해 놓은 게 있나, 우리는 대학교 등록금도 자기들이 내고 다니지 않나 아이들이 자기 앞으로 빚이 있어라고 하면 웃으면서 넘어가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불편한 줄 아냐라고 불만을 쏟아냈는데요.
부인은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돌반지만큼은 아이들한테 주려고 하나의 당 한 개씩밖에 안 남겨놨는데, 그것마저 팔려고 가지고 나왔으니까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냐 그런 것조차 없으면 우리가 뭘 해줬다고 얘기할 건데라며 눈물을 흘렸고, 결국 김봉곤은 자신의 보물 1호였던 포크레인을 600만 원에 팔아 넘기게 됩니다.
그에게 가족들의 행복은 그 무엇보다도 훨씬 중요했기에 끝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인데요. 그의 가족들 중 특히 셋째 김도현 양과 넷째 김다현 양은 아버지로부터 소리를 배운 청악동 국악 자매로 유명한데, 자신이 젊은 시절 명창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지만 끝내 되지 못하고, 접어야 했던 꿈을 아이들에게 투자를 하며 아이들을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느끼고, 그는 딸들이 말도 제대로 못했던 네다섯 살 때부터 판소리와 민요 등을 가르쳐 왔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김봉곤은 두 딸에게 판소리 뿐 아니라 인내심과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 백대 명산을 함께 다니며, 산 정상에서도 판소리를 지도하는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력 있는 소리꾼으로 교육시키게 되는데요. 김봉곤은 말하길, 다현이는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국악 명창이 되겠다 소리 하는 사람이 되겠다 글로벌 가수가 되겠다고 했었고, 자식들이 꿈이 있고 재능이 있다면 나는 키워주고 미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악기면 악기, 노래면 노래, 아이에게 좋은 스승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갔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지극 정성 어린 지도로 김다현은 결국 오디션 프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지금은 수입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나이에 자신이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 집안의 수입을 책임지고 있는데요.
김다현의 매니저를 자처하고 있는 김봉곤은 딸에게 네가 힘들다고 느껴지면 바로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네가 느끼는 것은 다를 수 있으니까. 라며 딸이 혹시라도 힘들어하지 않을까 당부했지만, 김다현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아버지에 대해 이 길로 인도해 주신 것도 아버지고, 반대로 제가 부모라면 나는 자식에게 절대 저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늘 제가 더 많은 사랑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라고 밝혀 진정한 효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김다현은 얼마 전 한 방송에서 행사를 준비하던 중 코피를 흘렸고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감추려다가 아버지께 들키기도 했었는데요. 당시 김봉곤은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 체질 검사를 해보게 되는데 키도 또래보다 작고 체중은 뒤에서 세 번째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기도 하게 됩니다.
다현이의 스케줄에 맞춰 산 지도 3년이 됐다는 김봉곤은 가수라는 직업이 전국을 다니니까 집에는 가끔 들어가게 된다 요즘 특히 행사나 축제가 많다 일이 있는 장소에 가서 방 잡아서 자고 먹고 하다 보니까 우리 집이 전국에 엄청 많아졌다. 라고 말하며 늦은 시간까지 딸의 스케줄 정리를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데요.
김다현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이 길을 못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제 아버지이기도 하시지만 제가 가는 길에 정말 중요한 선생님이기도 하신 것 같다라며 아버지의 헌신에 대한 마음을 드러냈고, 아버지께 돈 없으시다고 하셨잖아요. 만약에 부족하시면 제 거 쓰셔도 돼요라며 깊은 효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봉곤은 눈물 난다. 이미 효녀다 그렇게 힘들게 벌었는데 예쁜 마음만 받아도 나는 행복하다 받은 걸로 하겠다 쓴 걸로 하겠다라며 딸을 기특해 했는데요.
어린 나이에 힘들다고 투정 부리고 때를 쓸 나이에 오히려 김다현은 반대로 이렇게 아버지를 걱정해주고 있으니 세상에 효녀도 이런 효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김다현이 이렇게 올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타고난 본성이 착한 이유도 있겠지만, 또한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가정에서 효에 대한 교육을 잘 시켰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모쪼록 이렇게 착한 김다현이 앞으로도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올바른 사람으로 커나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큰 가수가 되기를 바라며 김다현, 김봉곤 부녀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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