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최백호의 얼굴을 보면, 그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는 그만의 특유한 매력 중 하나로, 그가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이유혁 씨의 노래가 좋아서도 있지만, 더불어 자신만의 쓸쓸한 느낌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오랫동안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자꾸 죽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 자신도 칠순을 넘기며 암을 앓아 죽음을 직시해야 했던 가슴 아픈 순간을 겪었습니다.
최백호는 태어난 지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경북 김천 부근 다리에서 마주 오던 터키 군 수송 차량에게 추돌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는 갓 스물여덟 살의 젊은 국회의원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며, 최백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극복해왔습니다. 그의 음악은 그의 삶에서 느낀 감정과 경험들이 녹아져 있으며, 그의 쓸쓸한 매력 역시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최백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는 에비 잡아 먹은 자식이라며 최백호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과의 인연을 단번에 끊어버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유했지만, 그렇게 인연이 끊어진 바람에 최백호의 가족들은 경제적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픈데, 거기에 할아버지까지 연을 끊으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어른들은 그렇게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원래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홀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교사 월급이 워낙 적어서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겪게 되었고, 어머니는 결국 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최백호는 어머니와 함께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최백호는 누나 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미래를 위해 기대를 많이 했지만,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중고교 시험에도 떨어지는 등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하고, 대신 매일 만화방에 앉아 있거나 바닷가로 가서 놀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머니한테 일러서 많이 혼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자 장손이었던 그를 과잉보호하셨기 때문에, 최백호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고 합니다.
최백호는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고 소극적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학교 1학년 입학식 날 부산으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단발머리 소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3년간 말 한마디도 못해보고 가슴 아리를 하며 매일 밤마다 공부도 안 하면서 보내지도 못하는 편지를 그렇게 썼다고 합니다. 이 때 자신의 작사 실력이 쌓였다고 하죠. 그러나 원래 가수가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최백호는 원래는 미대를 진학하려던 학생이었고 기타 연주도 혼자서 막 배워서 정석으로 배운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누나 두 명을 교육시키던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막내 최백호를 대학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백호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을 포기한 채 일단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너무나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신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최백호의 나이 고작 스무 살의 그만큼 어린 나이에 암으로 별세하시게 되었습니다.
최백호는 그때가 자신의 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날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종 사촌 형이 영도에 살았는데 어머니를 화장하고 오면서 저 부둣가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너무 오니까 형이 나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려서 같이 걸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인 양 회한이 밀려와 사흘 밤낮을 내내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게 되자 최백호는 어릴 때부터 죽음이란 게 우리 삶의 끝에 있는 게 아니고 항상 주변에서 같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때 최백호는 슬픔과 어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돌연 군 입대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복무 중 결핵에 걸려 강원도 원주에서 제일 하사관학교 조교로 군 복무를 하던 그는 생사를 오가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어머니를 여의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군 입대를 선택한 최백호였지만, 결핵으로 인해 1년 만에 의병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상금으로 11만 5천 원을 받고 쫓겨나듯 제대를 하게 되었으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술 취미를 살려 극장에서 일하며 살았던 그는 영화 간판을 그리는 일을 시키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주일 만에 그만두고 막막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최백호는 자신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부산의 해수욕장 인근에서 가장 싼 방을 구해 혼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도 다 떨어지는 큰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슬픔과 아픔을 달래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건강을 되찾게 된 그는 한 친구의 매형이 운영하는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고, 그는 이후 인기 가수가 되기까지의 오랜 시간을 거듭하며, 자신의 꿈과 열정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최백호는 당시 아마추어였으며, 노래를 좋아해서 클럽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직업으로 삼을 만한 수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의 노래 실력에 자신의 수준을 비교해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리만 지르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업소에서 하룻밤에 일곱, 여덟 곳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제작자의 눈에 띈 최백호는 대형 음반사인 서라벌레코드와 계약을 하며 1977년 데뷔곡 ‘내 마음 갈고슬리로’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큰 사랑을 받아 최백호는 MBC 가요제 신인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이 곡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노래로 알려졌는데, 사실 최백호가 어머니를 그리면서 쓴 가사였습니다.
최백호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가사를 쓰는 능력을 갖춘 것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외동 아들이 걱정되어 물려주신 선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곡은 최종혁이라는 작곡가 형님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최백호가 쓴 글을 보고 멜로디를 만들어서 완성된 곡이 되었습니다. 최백호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이 노래를 발표하면서 최백호는 본격적으로 가수 인생에 들어서며, 이후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영일만 친구 등의 연이은 히트로 명성을 떨친 최백호는 지구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기며 거액의 계약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은행 계좌를 여는 법을 몰라 현금으로 900만 원의 계약금을 받아 하숙집 이불 밑에 숨겨둔 채로 생활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이런 부분도 챙겨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부재한 어머니의 그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김자옥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의 성격 차이 때문에 3년 만에 이혼하게 됩니다. 이후 최백호는 인기를 잃고 긴 슬럼프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자옥은 후에 오승근과 재혼했다가 201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최백호는 이를 끝으로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최백호는 이후 SBS 라디오에서 오랫동안 DJ를 맡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송 전 시간대에 진행하는 프로의 진행자가 김자옥의 동생이었던 아나운서 김태욱이었습니다. 그리고 김태욱마저도 김자옥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자택에서 사망하게 되면서 최백호는 자신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참으로 불길한 일들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최백호는 콘트라베이스 악기를 전공하던 10살 연하의 지금의 아내인 손소인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최백호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처가에서는 이미 한물간 가수 최백호에 대해 극심하게 반대를 했고, 결국 장인어른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최백호는 떨어진 인기 때문에 결혼 후 1년 동안 단돈 10원도 가져다 주지 못한 바람에 미사리 라이브 클럽을 수 년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백호는 손님이 던지는 수박 껍질과 땅콩을 얼굴에 얻어 막기까지 하자 너무나 서러워서 선배 가수 최희준에게 하소연도 해봤지만, 최희준은 “야 네 출연료의 수박 맞는 값도 다 들어있어, 참아야지 멀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미국행을 제안받게 되면서 최백호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는 환경이 달라진다고 해서 어려웠던 사정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미국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디제이도 했지만 해당 방송국이 없어지면서 결국 2년 만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어느 날 방 너머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내 첫사랑도 저렇게 설거지를 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최백호는 그러며 뭔가에 홀린 듯이 노래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노래가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는데요.
최백호는 자신의 노래로 대한민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삶은 인기와 성공, 슬럼프와 역경 등 다양한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최백호는 처음 가수로 데뷔할 때는 아마추어 수준으로 시작하였으며, 한 동안은 업소에서 하룻밤에 일곱~여덟 곳에서 노래를 불러 생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제작자의 눈에 들어가 서라벌레코드와 계약하게 되어 데뷔 앨범 [내 마음 갈고리]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가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최백호는 그 후 영일만 친구 등의 히트곡으로 명성을 떨치며 인기 가수로 자리 잡게 되었으나, 결혼 생활 등의 문제로 인해 긴 슬럼프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도 다시 한 번 지희의 전성기까지 가져다 주며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공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딸과의 어색한 관계 문제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최백호는 그동안 머나먼 한국에서 늘 딸 생각만 하면서 살아왔는데, 딸은 자식을 미국에서 공부시키기를 원하게 되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딸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색한 나머지 서로 거리를 두게 되는데, 이후 최백호는 적극적으로 노력하며 딸과 서로 싸우기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간신히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최백호는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윤이라는 젊은 여가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자, 역시 젊은 가수인 김진표가 대한가수협회의 가수들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게 되면서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부회장이었던 최백호는 김진표의 주장에 반박 입장을 내놓게 됩니다.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인 최백호는 가수로서의 성공뿐 아니라 인생을 통해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갈등을 극복하며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한 인물입니다.
최백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죽음 등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성인이 되어 가수로 데뷔합니다. 그러나 인기도 잠시였고 이혼, 슬럼프, 부모와 가족의 죽음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국 인기를 되찾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등 성공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딸과의 관계 문제도 겪었으며 다른 가수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 얽히게 되는 등 어려움과 갈등을 계속해서 극복해나가야 했습니다. 마침내 폐암으로부터 이별의 순간까지 준비를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폐암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겪은 무게감과 고독감은 그동안 죽음에 대해 마음속에 갖고 있던 초연한 인식을 크게 바꾸게 되었습니다.
최백호는 인생의 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극복하면서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하며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가수 중 하나로 꼽히는 최백호는 그의 인생에서 죽음과 함께한 순간들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데 성공한 인물입니다.
최백호는 폐암 선고를 받고, 오랜 기다림 끝에 폐암이 아니라는 좋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인생을 되돌아보며 사람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데요.
그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60대와 또 다른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전에는 잡다한 생각으로 불안해했던 것들이 정리되고 편안해졌다는 것을 언급하며 80대, 90대까지도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다짐을 합니다.
또한 그는 서둘러서는 안 되고 천천히 기다리다 보면 모든 일은 팔자대로 풀리게 된다는 것을 인생의 지혜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데, 최근 가수 김호중으로부터 롤모델로 추앙받은 데 이어 방탄소년단의 한 멤버가 힘들 때 위로를 받은 곡으로 최백호의 노래를 소개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과 응원을 바라며, 그가 좋은 건강과 함께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좋은 노래를 들려주기를 기원합니다.
가수, 시인, 아티스트 최백호님. 힘든 역경 속에서 낭만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