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 씨 하면 효녀 가수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데요. 현숙 씨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야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또한 현숙 씨는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미혼인데요. 놀랍게도 아들이 있었습니다.
현숙 씨의 본명은 정현숙인데요. 그러니까 성만 빼고 이름을 그대로 쓴 거죠. 1959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무려 열두 남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노래를 잘하고 가수기가 다분했던 현숙 씨는 동네 장기자랑에 참여해서 이런저런 생필품을 우승상으로 많이 받았는데요. 이에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의 반대가 엄청났죠. 특히 아버지는 회초리를 드시기도 하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면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내셨어요.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는 딸의 모습을 보니까 엄마는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딸이 상경할 때 온 만원과 쌀 한 말, 김치 한 통을 싸줍니다. 현숙 씨는 가수가 되기 위해 그걸 들고 서울로 올라온 거예요. 일가친척 하나 없이 아는 언니 집에서 살았는데요. 돈이 없어서 거의 걸어 다녔고요. 밥도 하루 세 끼 다 못 먹고 하루 한 끼 밖에는 못 먹었다고 하더라. 이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약국 앞에서 쓰러져서 목숨을 건졌다라는 말을 직접 본인이 하기도 했어요. 그 후 너무나 고마운 사람을 만나서 가수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었는데요. 고 김상범 씨라는 가수 아시는지요? 오뚝이 인생이라는 곡을 불러서 아주 유명한 가수인데요. 그분한테서 곡을 받았어요. 타지에 계신 아빠에게 라는 곡으로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게 되었습니다.
현숙 씨는 항상 생글생글 웃는 귀여운 인상과 그리고 독특한 비음창법이 매력적이잖아요. 이런 게 굉장히 대중들에게 어필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에 현숙 씨는 인생곡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 유명한 정말로를 부르게 되었어요. 그 곡으로 3년 연속 엠씨 가수상을 수상하면서 이제 인기 가도를 달리게 됐죠.
이후 1982년에는 포장마차라는 곡을 불러서 톱 가수의 반열에 올랐고요. 그 당시 포장마차 매출이 엄청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태극기를 소재로 한 건공감리 청웅백을 발표했는데요. la 올림픽 승정보와 함께 히트하면서 경기장과 국민들의 응원가로 아주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현숙 씨는 1980년대 가수 나미 씨, 박미 씨와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죠. 이렇게 잘 나가고 있다가 현숙 씨가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는데요. 1988년부터 슬럼프에 빠져서 무려 7년 동안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 주변 사람들이 슬슬 알게 된 거죠. 알고 보니까 현숙 씨가 아픈 부모님을 돌보고 있었던 거예요.
원래 부모님은 농사를 짓던 분이었는데요. 가수 일을 하느라 현숙 씨의 뒷바라지를 하러 서울에 올라와서 같이 살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1980년부터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를 돌보다가 아버지는 치매가 와서 두 분 모두 돌보고 있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케이비에스 다큐멘터리 팀이 느닷없이 현숙 씨 집에 들이닥쳐서 그런 현숙 씨 집에 일을 찍기 시작했어요.
1996년 kbs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사람과 사람들의 병 드신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사는 현숙 씨의 이야기가 방송되었고 방송에 현숙 씨의 노래 사랑하는 영자 씨가 나왔는데요. 그것을 계기로 사랑하는 영자 씨가 역주행하며 현숙 씨는 7년 만에 재기에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간 지 3개월 만인 1996년에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는데요. 7년째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현숙 씨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앞으로 홀로 남을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아버지가 자기를 가수로 재기시킨 것 같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위해 쉬지 않고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당시 히트한 노래로는 1997년, 요즘 여자, 요즘 남자, 2002년, 오빠는 잘 있단다, 2004년, 춤추는 탬버린 등이 있습니다.
근데 어머니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 충격 때문인지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는데요. 치매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이제는 거의 움직이지를 못하셔서 누워만 계셨다고 해요. 무려 14년 동안 스스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누워만 계시다가 중풍을 앓은 지 28년 만인 2007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계시면서도 딸이 일을 나갔다가 들어올 때까지 새벽 2시고 3시고 뜬눈으로 기다리셨다고 해요. 이 부분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현숙 씨가 그렇게 효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그렇지 현숙 씨와 같은 효도는 정말 실천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돌아가신 뒤에야 현숙 씨는 부모님을 모실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살아 생전에 아시면 가슴 아파할까 봐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것이었죠. 형제가 무려 열두 형제나 되는데 결혼하지 않은 딸이 모시는 것이 부모님께서 더 편안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모셨다고 해요. 이때 현숙 씨의 나이가 36살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도 도왔어요. 낮에는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고 밤에는 현숙 씨가 직접 수발을 했습니다.
간병인을 쓰지 않았던 것이 부모님이 간병인을 쓰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러기에는 아버님의 증세가 너무나 심각했는데요. 아버지는 막 고함을 치기도 하고, 그리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뭔가를 찾기도 하고, 또 딸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집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서 기저귀를 갈아채워드려야 했고, 목욕도 스스로 못하시기 때문에 딸이 직접 목욕을 시켜드려야만 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잠을 못 이룬 날에는 낮에는 방송국이든 차 안에서든 토막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중풍으로 다리를 못 쓰는 상태였는데요. 딸이 집안 공연을 가게 되면 2, 3일 동안 변을 보지 못하고 얼굴도 까칠해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숙 씨는 아예 부모님을 모시고 일하러 가기도 했는데요 여의도 방송국이나 한강에서 공연을 할 때 맨 앞자리에 앉게 해드렸어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현숙 씨는 혼자서 남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구요, 쓰러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해요. 더구나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가 않았는데요 병원비, 약값이 상당했습니다.
하루에 스무 개씩 쓰는 기저귀값, 호스를 통해서 액체로 식사를 하셨는데요 이런 게 모두 다 돈이었습니다. 한 달에 부모님께 들어가는 돈이 수백만 원을 넘었어요. 현숙 씨는 하늘이 도우셨는지 딱 필요한 만큼 일이 끊기지 않아 다행이었어요라고 그때를 기억했습니다. 진짜 하늘이 낸 효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느라 결혼 시기도 놓치고 말았죠. 2019년 마이웨이에 출연해서 왜 이렇게 결혼을 못하게 되었는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아픈 부모님을 두고 나 몰라라 하고 결혼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죠.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자기 부모님을 모시고 평생 같이 살아줄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현숙 씨는 정말 부모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효녀라고 부르는데, 정작 자식은 부모님을 더 잘 모시지 못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도 다니지 못했고, 맛있는 것도 대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고 말았다고 해요. 이런 한을 그녀는 대신 몸이 힘든 어르신들을 돌보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2013년도에 skc 최신원 회장과의 인연으로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데뷔 34년 만에 첫 디너쇼를 열었는데요. 디너쇼 수익금 1억을 기부해서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습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 4천만 원이나 하는 이동 목욕차를 무려 17대를 기부했는데요. 자신이 부모님을 모시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어르신들의 목욕을 직접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현숙 씨는 재산을 축적하기보다는 돈이 모이면 기부도 많이 하고 있고 어르신들을 위해서 봉사활동도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현숙 씨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나중에 외로워질까 봐 걱정이었는데요. 다행히 그녀에게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들은 자기 바로 밑에 있는 동생 내외의 막내 아들인데요. 그 아이를 입양했어요. 이걸 허락해 준 동생의 아내도 참 마음이 넓은데요. 이게 가능했던 것은 현숙 씨가 동생 아내와도 너무나 잘 지냈다고 합니다.
남동생이 사업으로 바쁠 때 남동생 대신 동생 가족을 돌봤고요. 동생 가족과 거의 한 가족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입양을 할 때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해서 낸 결론이라고 하고요. 당사자 아이의 허락 하에 입양했다고 하죠 아들을 입양할 때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요. 이제는 스무 살이 넘었겠네요. 아드님과 행복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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