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전 이리역 폭발 사고 하춘화… 아이 없는 이유 밝혀…

하춘화는 국내 가요계 최연소 데뷔와 8500회 최다 공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레전드 가수입니다. 그런 그녀에게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과거 이리역 폭발 사고에 휘말려 생을 마감할 뻔했지만 이주일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줬던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또한 하춘화는 어린 나이에 베트남과 북한에 끌려다니며 전쟁 통에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인으로 귀화할 뻔 하는 등 다사다난했던 그녀의 이야기를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긴글이니 시간 나실때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MBTI 궁합표 검사지 “16가지 유형 다 모여라”
‘착한’ 운전자에게 10만원 지급 ··· 자동차 탄소포인트제
“1인당 평균 136만원” 국민연금 건강보험 환급금 조회하기

macbook

1인당 평균 136만원
국민 연금 환급금 찾아가세요

정부로 여러분의 돈
2조 3860억원이 곧 환원됩니다.
1인 평균 환급금 136만원
지금 바로 조회하세요!

최연소 가수 하춘화 데뷔

하춘화는 1955년생으로 올해 나이 69세입니다. 그녀는 나이 7살 때인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해에 데뷔했습니다. 하춘화는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습니다.

그녀는 한때 최연소 가수로 데뷔와 앨범 발매를 해서 기네스북에 오른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서 마이클 잭슨이 다섯 살의 나이로 데뷔함으로써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과거 방송에서 여섯살 아이가 대중가요 발표한 건 최초라 외신들이 취재해 왔었습니다.

역도산이 한국을 방문해 만났는데 일본으로 데려가서 저를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라고 해서 아버지가 반대했습니다. 일본인이 되는 건 싫다고 해서 무산됐다며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이어 하춘화의 첫 무대는 당시 제일 큰 극장이었습니다. 독집 앨범에는 12곡을 담았습니다. 발표한 노래만 2500곡 정도 된다고 합니다. 신곡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다음 앨범을 제작했고 작사 작곡이 끝나면 바로 녹음에 들어갔습니다. 몇 천 곡의 노래를 발표한 건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셋 뿐이었습니다.

이후 하춘화는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서 뒤이어 불러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 가수상을 수상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습니다.

이주일과의 만남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히려 못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제 공연에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고 말하여 이주일과 같이 일하게 됐습니다.

이후 하춘화와 이주일의 인연은 10년간 이어졌는습니다. 이에 대해 하춘화는 1977년 리사이클 쇼 전속 사회자를 모집했고 공고를 보고 이주일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단장님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합격시켰는데 하춘하가 오디션을 다시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춘향전 공연을 하는데 이주일이 너무 열심히 해 결국 전속 계약을 맺고 10년간 함께 공연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총 8500회 공연 중 7500회는 그와 함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던 본인이 하춘화 덕분에 집을 샀다라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은인, 이주일

그 뒤 하춘화는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가 발생할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이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의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에 하춘화 역시 이주일을 평생 은인으로 여겼으며 2002년 2주일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빈소를 찾았다고 합니다. 장례식때 마지막 인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너무 가슴에 사무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하춘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리역과 제 공연장은 500미터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했고 위력이 엄청났습니다. 이리역 전체의 유리를 깨뜨렸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습니다. 땅 속으로 떨어지는 공포가 느껴졌고 이리시 전체가 암전됐습니다. 공연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살아 나가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주일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암흑 속에서 나는 많이 다친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난 것 같으니 빨리 나가자고 했고 나무 하나가 걸려 있어 그걸 타고 올라야 되는데 담장 위로 가서 뛰어내리라 했지만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주일의 머리를 딛고 내려왔고 이주일씨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져서 두개골 함몰 부상을 당했는데도 몰랐습니다. 이주일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북한 공연 후일담

이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 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원 및 결혼 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1981년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블루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 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습니다.

하춘화는 1985년에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습니다. 이에 그녀는 1985년 그때만 해도 김일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포 민족보다 적진에 가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벌벌 떨며 가서 고려 호텔에 묵었고 자유로운 개인 행동은 불가능했습니다. 방 앞에 안내원이 지켜서 방 안에서 대화도 자유롭게 못했습니다. 녹음기를 틀어놓거나 필담했고 3박 4일 긴장과 초조한 마음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하춘화는 1991년 총 공연 횟수 85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습니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짜장면 집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습니다.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라고 아쉬움을 털어놨습니다.

하춘화 여자가수 최초 박사 학위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학업에 열중하여 1994년에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 과정을 수료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이어 2천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가요의 원료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 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 성균관 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로써 박사 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 그리고 아이는?

하춘화는 1981년 사업가 정운찬과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으나 10개월 만에 이혼했습니다.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로 알려졌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솔로로 지내다가 이후 1995년 지금의 남편 이인순과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났으며 남편 이인수는 하춘화보다 4살 연상이고 직업은 기획조정실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38살과 42살 때 재혼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으며 재혼 후 자녀는 아직 없습니다. 한 방송에서 하춘화는 남편에 대해 누군지 모르고 만났고 국장 언니가 진국이라고 해서 봤는데 와이셔츠 안에 검정 러닝셔츠를 입었더라 너무 별로였다고 회상했습니다.

1년 만에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는데 12월 31일 호텔에서 만나자라고 한 것이 만난 계기를 전했습니다. 이인수는 소개를 받은 후 1년 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당시 하춘화로 인해 자신까지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이후 고민 끝에 만나기로 결심하여 크리스마스 디너쇼에서 재외했습니다.

하춘화는 사실 신혼 초에 임신을 한 적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유산을 하였고 이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입양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춘화는 순리대로 살기를 원하는 데 노력을 많이 했어요. 이미 저에게 많은 걸 주셨으니 자식은 안 주시려나 보다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더 걱정했고 큰 불행 결점인 것처럼 애기했습니다. 입양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하더군요라고 털어놨습니다. 이후 전 세계 여기저기 봉사 활동을 다니며 선행을 베풀며 하춘화가 지난 40년 동안 부루 이웃 돕기에 기부한 금액이 무려 20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