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계의 레전드 심형래가 최근 한 방송에 나와 고백하길 “내가 영구 캐릭터로 데뷔 7개월 만에 코미디언 순위에서 황제 이주일 선배의 장벽을 깨고 1위를 했다. 이후 나의 인기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는데, 하물며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1위가 세종대왕, 2위가 이순신, 3위가 심형래로, 살아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cf 한 편당 내가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더 많이 받았다. 1984년도에 압구정 현대 아파트가 7800만 원 하던 게 현재는 40억 원으로 그때 내가 광고만 100편 넘게 찍었으니까…. 굳이 비교하자면 당시로서는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160채를 구매할 수 있었던 수입을 cf만으로 벌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전성기가 지난 21세기에 태어난 아이들도 코미디언으로서의 심형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었으며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라는 말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기를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사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후 영화감독으로서 행보가 명암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바람에 그의 인생에는 날개 잃은 추락이 시작되고 맙니다. 오늘은 이처럼 한때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황제라 불리며 온 국민적 사랑을 받다가 이혼, 도산, 파산, 도박 등이 감당하기 힘들어한 때는 극단 선택을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가 어쩌다 저런 곳에서까지 행사를 뛰는지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심형래의 파란만장한 인생 아래에서 자세히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긴 글이니 시간 나실때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개그맨으로 큰 인기
1982년 KBS 제1회 개그 콘테스트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연예계에 데뷔한 심형래는 바보 연기에 능해서 데뷔하자마자 곧 주목받게 됩니다. 그는 동료 개그맨들 속에 섞여 있어도 언제나 분장이나 의상 면에서 더 웃기고 더 튀었습니다.
또한 심형래의 레전드급 몸 개그는 그를 순식간에 최고의 스타로 올려주게 됩니다. 아무튼 그의 전성기 시절에는 코미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로서, 이주일를 뒤잇는 최고의 개그맨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우뢰매, 영구와 땡칠이
또한 1984년부터는 영화배우로도 겸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국 어린이 영화의 한 획을 그은 우뢰매의 에스퍼맨 역으로 영화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며 이후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로도 많은 어린이의 호응을 얻어 1990년 당시 영화 관객 동원 1위를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잡지사들과 평론가들은 심형래의 양산형 어린이 영화는 영화 취급을 하지 않아, 당시 영화 흥행 순위에 그의 영화는 아예 넣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어찌 됐든, 영구와 땡칠이가 흥행해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입을 올렸고, 이 영화를 지원했던 제작사가 파산 직전에서 심형래 덕분에 살아났기 때문에 지금도 심형래가 고맙다고 했습니다.
상당한 재산
이처럼 심형래의 전성기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 보니, 당시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와 스캔들이 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몇 년간 동안 연예인 소득 전체 1위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재테크에도 힘을 쓰게 되는데, 실제로 본인 스스로가 고백하길 “당시 자신이 강남의 빌딩이 몇 채나 되고 수도권의 알짜배기 땅이 몇 군데나 되었다.”라고 했으며 이뿐만 아니라, 1980년대 말부터는 강남의 대규모 유흥업소를 여러 개 운영했지만, 다만 본인이 유흥업소 운영은 창피하게 보는지, 훗날 자서전에는 유흥업소 이야기를 쓰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이제는 지나간 얘기지만 이 상태에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거나 그냥 큰 사고 안 치고 도박만 멀리하고 개그맨 심형래로 평생 대접받으면서 여유롭게 여가를 보내며 살아갈 기회가 넘쳐흐를 정도로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후 이 편안하게 생활할 기회를 모두 걷어차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오판하며 스스로가 흑역사를 자초하게 됩니다.
시작된 시련
영화배우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특별한 준비나 보강도 없이 영화감독에 도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훗날 심형래나 동료들이 하는 말을 모아보면 그는 사실 초창기 시절부터 영화 제작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동료 개그맨들의 캐스팅부터 시작해, 코미디 씬의 연출 등은 사실상 심형래가 전권을 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해온 어린이 영화의 성공 요인으로 본인의 코미디 실력과 스타성 그리고 개그맨 동료들 덕분에 성공했다라고 판단하였으며, 사실상 감독들의 영화 연출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저 쉬운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그의 과대망상이 차라리 어린이 영화에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본격적으로 sf 영화에 뛰어들면서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여러가지 악재
1993년 영구와 공룡 쮸쮸를 제작한 그는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앞서 얘기한 그의 재산인 강남의 빌딩을 비롯한 수도권의 알짜배기 부동산을 모조리 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필 당시 쥬라기 공원과 같은 시기에 개봉하면서 영화 제작비 24억 중 고작 1억 원의 수익만을 올리면서 그야말로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실패를 맛본 그였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의 괴수영화 고질라에 비견되는 한국형 괴수영화인 용가리라는 영화로 다시 한번 관심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용가리 역시 그저 비명만 지르는 막장영화로 또 한 번 쫄딱 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용가리는 애초에 수원시의 지원을 받아서 제작했었는데, 이 용가리가 대차게 망해버렸기 때문에 훗날 수원시와 한바탕 시원하게 소송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평생의 꿈이었던 sf 영화를 찍었지만, 그의 꿈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건, 그의 영화 ‘용가리’를 당시 일본 렌탈 시장에 비디오를 내놨지만 한 번도 대여되지 않은 비디오로 방송을 타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로는 그 유명한 디워를 발표하며 842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했지만, 당시 제작비가 300억 원이라 또 170억 원이라는 거액의 적자를 보게 되면서 당시 사기 혐의로 형사고소를 당하는 등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는 뜬금없이 자신의 슬래스틱 코미디를 선보이겠다며 영구 영화로 되돌아가 ‘라스트 갓파더’라는 영화를 찍었지만, 또다시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하고 막을 내려야 했고 이후 2011년 7월 그의 영화 제작사인 영구아트무비가 결국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파산 후 생활고에 시달려…
설상가상, 같은 해 10월 연구아트 직원의 폭로가 나오게 되면서 심형래가 주위에 있는 여자 400명의 연락처가 담긴 여자수첩을 직원들 앞에서 항상 자랑했고, 그리고 회의 도중 회장이라는 인물과 전화 통화를 하며 대놓고 로비하며 이용했다며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도박설, 횡령설, 임금 체불설, 국고 탕진 등 그에 좋지않은 기사들이 봇물 터지듯 계속 나오자, 결국 2013년 1월 서울중앙지법에 개인 파산을 신청하게 됩니다.
이때 빚만 100억 원이 넘다 보니 거액을 빌려줬던 채권자들의 인생과 더불어 그 잘나갔던 심형래의 인생 또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가 도산하는 과정에서 정말 안타깝게도 부인 김 모 씨와는 결혼 19년 만에 협의 이혼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파산할 당시 170억여 원의 금융권 채무에 대해 면책 허가 결정이 났지만, 빚 탕감 결정 이후 클럽 룸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면서 또다시 논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부터는 천하의 심형래가 생활고에 시달려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행사를 뛰게 되는데 그 행사장소가 과거 심형래의 개그맨 시절의 명성을 생각하면 정말 초라하게 짝이 없었습니다.
마당놀이로 재기
하지만 2018년부터는 마당놀이에 진출하게 됩니다. 다행히 이게 천성에 맞는 일로 돌아와서인지, 흥행이 아주 잘 되게 되는데 그리고 얼마나 초대박을 쳤으며 티켓을 못 사서 그냥 집에 간 사람들도 수두룩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심형래 그가 고백하길 “사람들이 힘들면 옳지 못한 선택을 할 때가 있는데, 나라고 왜 그런 유혹이 없었겠나? 한때 나는 국내 연예인 가운데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후 검찰에 소환되고, 재판받고, 압수수색 받고 파산하고 그런 일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는데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갔다. 택시 운전을 하든, 노점상을 하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장점이 있다는 걸 믿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다. 고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고, 그다음은 본인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사고의 방향이 긍정적인지, 패배적인지 그 차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늘 긍정적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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