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농구 스타 한기범의 은퇴 후 안타까운 근황이 전해졌습니다. 2023년 7월 20일 방송된 mbn 특종 세상에는 한기범과 부인 안미애가 출연해 연이은 사업 실패와 희귀, 유전병으로 인한 고통, 두 아들의 경계성 자폐증에 대해 밝혔는데요.
1961년생, 올해 나이 60세인 한기범은 키 205센티미터로, 하승진, 서장훈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농구 역사상 최장신 선수였습니다.
고향 천안시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를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그만두고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당시 농구부를 막 창단했던 명지 고등학교의 설득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죠.
이후 1982년 정봉섭 중앙대학교 농구 감독이 한기범을 스카우트했고, 이듬해 1년 후배인 김유태까지 가세해 한국 농구 최초의 장신 더블 포스트를 구축하며 중앙대의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김기범은 1986년 졸업 후 새로 창단된 기아 산업에 입단해 유재학, 김유택과 함께 3강으로 이끌었고, 이후 중앙대 후배인 허재가 합류한 뒤 기아 불패 시대를 만들었죠.
당시 인기를 증명하듯, 한기범은 1989, 1990 농구 대잔치에서 mvp와 함께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주무기였던 장신 때문에 무릎에 적지 않은 부담이 갔고, 이런 상태에서도 계속되는 경기 일정으로 쉴 틈이 주어지지 않았죠.
결국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맞아가며 출전을 이어간 끝에,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기범은 부상을 달고 살며 전성기의 위력을 잃어버렸고, 1990년이 지나며 한기범은 부상으로 선수 생명 자체가 끝나다시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기범은 오랜 재활에 매달린 끝에 1992년 농구 대잔치에 출전하며 선수로 재기하는 데 성공했고, 기아 자동차가 총 7연패의 우승을 하는 데 제 역할을 다 해냈죠.
이러한 한기범의 활약은 기아 자동차가 최후로 참여한 19,961,997 농구 대잔치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허재가 무면허 음주 운전으로 선수 자격이 정지되고, 김유택조차 재기량을 발휘 못하는 상황에서, 은퇴 직전에 한기범이 만신창이가 된 무릎을 끌고 고군분투 비록 기아 자동차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한기범만은 한때 자신이 왜 한국 최고의 센터였는지를 증명했죠.
한기범은 1996, 1997 농구 대잔치를 끝으로 은퇴했지만, 원 없이 많은 농구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후회나 미련은 남지 않았습니다.
한기범이 선수로 활약할 당시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한 기범은 이광수 닮은 꼴로 유명하죠. 이런 유명세 덕에 한기범은 sbs 런닝맨에도 여러 차례 출연했는데, 이광수는 초등학생 때부터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런닝맨 출연 이후 한기범은 해외에서 자신의 인기를 실감했다고 하는데, 자신이 소속된 시니어 농구팀과 방문한 해외에서 도, 유노, 광수라며 자신을 알아보는 현지 팬들을 만났죠.
당시 한기범은 사인 요청으로 대기줄까지 생기기도 했다며, 한류에 잠깐 몸 좀 담갔습니다라고 호통하게 웃기도 했습니다.
한편, 특종 세상에 출연한 한기범은 은퇴 후 사업을 했다가 큰 실패를 맛봤다고 털어놓았는데요. 1990년대 농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한기범은 은퇴 후 홈쇼핑과 연계한 성장 보조제 판매를 시작해 초반 대박을 쳤지만, 이상하게 수익이 크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불공평한 계약서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한기범은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면서 집 세 채를 날리고 산동네 월세 살이를 하는 등 생활고를 겪었는데 이 때문에 고생 모르고 부잣집 막내 딸로 자랐던 아내 안미애도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죠.
당시를 떠올린 아내 안미애는 “매일 죽는 게 나았다. 눈 뜨기 싫었다 돈 없고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전업주부였던 내 삶이 틀어졌다 우리 아이들도 제대로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존심 다 버리고 남편에게 막 울면서 울타리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한기범은 너무 미안하다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라고 속죄의 마음을 밝혔죠.
뿐만 아니라 한기범은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희귀 유전병 때문에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었으며, 자신 또한 두 번의 심장 수술을 받았다고 털어놨습니다.
한기범의 아버지와 남동생 또한 각각 190센티미터, 197cm의 장신이었는데, 특히 한기범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자신과 같은 병으로 동생을 잃은 전력이 있어서 제발 예60살 때까지만이라도 살아남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죠.
그는 아버지께서 심장 수술 후에 1년 정도 사시고 돌아가셨다 남동생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갔다 대동맥이 터져서 죽는 병이라고 하는데 나도 100% 죽는다고 하더라. 라고. 당시 아내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대성통곡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경제적 사정까지 좋지 못했던 한기범은 다행히 한 재단을 통해 지원받아 두 차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죠. 하지만 한기범은 두 번째 수술 당시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아내에게 아이를 지우는 게 어떠냐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는데, 아내가 오히려 용기를 주면서 힘을 얻었으며, 현재는 두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또한 한기범은 두 아들이 경계성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는데요. 그는 “큰 아이가 경계성 자폐 스펙트럼이다. 어느 날 이상한 말을 하더라 보니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주위를 최소한 서너 바퀴를 도는 거다 친구도 못 사귀고 가만히 있고 이상했다 집사람이 병원에 가서 검사받은 것 같더라.”라고 두 아들 모두 경계성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한기범은 두 아들에게 희귀 유전병만큼은 물려주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했죠. 그는 이런 위험한 병을 아이들에게 준다는 부분이 걱정이 많이 됐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없다고 하더라. 그때는 아이들이 경계성 자폐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명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 한기범 부부는 시장에서 장을 본 뒤 아들이 일하는 정육점에 방문했죠. 이제 일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둘째 아들을 본 한기범의 아내는 이제는 칼도 쓰냐? 라고 기특해 했습니다. 정육점 사장 역시 갈비를 보며 이게 다 다운이가 썬 것 이라며 대견해 했죠. 아들을 본 한기범은 나는 처음 봤다 짠해서 눈물 날 뻔했다. 라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병을 극복한 후 한 기범은 방송 출연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한기범 농구 교실을 열어 유소년 농구 사업을 벌이고 있죠.
그리고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받은 경험으로 심장병, 어린이, 다문화 가정, 농구, 꿈나무 등을 후원하는 사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2011년부터 2023년까지 프로농구 선수들과 농구를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모아 심장병 어린이 돕기, 희망농구, 올스타 자선 경기를 개최해 수익금을 한국심장재단과 어린이 재단, 한국 선천성 심장병 환호회에 나누어 기부했죠.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농국의 인물들을 돕기도 했는데 전 국가대표 농구 선수였던 고 김영희와 추한찬을 돕는 모습이 방송에 직접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기범의 근황에 대해 누리꾼들은 “한기범 씨, 꼭 건강하세요 두 아들이 착하고 올바르게 자라서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가족분들이 다 심성이 곱고 아름다운 가족이네요. 한기범 님 사남과 순수함 보고 배우고 싶다.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레전드 농구 선수지” 등의 반응을 보였죠 모쪼록 앞으로 건강 챙기시고 좋은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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