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용필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가요사를 통틀어 자타 가공이 나는 최고의 가수 조용필 하지만 조용필 본인은 자신의 인생을 너무나 처참하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해왔는데요.
가요 대상을 무려 6년 연속으로 수상해서 이후 대상 수상을 거부했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으로 1위를 하면 차트에서 제외시키는 골든컵 제도 역시 1위를 너무 혼자서 독식했던 조용필 때문에 생겨나게 된 제도였지만 이렇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도 그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말하며 자식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의 인생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미스터리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해 이렇게 언급을 했었는데요.
과거 연예계 약초 파동으로 방송 출연이 막혀 밤무대를 전전하던 시절 조용필은 한양대에 다니던 여대생이었던 박지숙과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들면서 암울했던 시절 그녀가 유일한 안식처가 되게 되는데 이박지숙이라는 인물은 당시 3선 국회의원이자 충남 공주 신풍 중고등학교 이사장인 박찬의 딸이기도 했던 지방의 실력자 집안 출신의 인물이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로부터 회자되는 이들의 결혼은 하객도 없이 기자들만 모아 봉선사에서 주지스님의 주례로 깜짝 결혼식이 진행되었고 결혼 예물은 각자 끼고 있던 시계를 풀어 다시 채워주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이후 절에서 찬물 한 그릇 떠놓고 결혼했다는 유명한 일화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요.
당대 최고의 톱스타 조용필은 당시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비밀리에 깜짝 결혼식을 치렀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의 의문과 추측이 꼬리를 물었는데 한 이야기에 따르면 여자 집안이 지방에서 꽤나 힘 좀 쓰는 거의 조폭 정도의 수준이라 그 지역에서는 아무도 손을 못 대는 집안이었는데 박지숙이 죽자 살자 조용필을 쫓아다니는 바람에 집에서 머리까지 깎아 감금을 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딸에게 못 이긴 아버지는 자신의 파워로 반강제적으로 조용필에게 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고 당시 조용필은 마음에도 없었던 결혼식을 권력과 협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올리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박지숙은 후에 한 기자와 만나 조용필이 자기 결혼인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떠밀리듯이 혼인을 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조용필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또한 한편으로는 둘의 결혼이 조용필과 이미숙의 스캔들을 덮기 위해 진행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박지숙과 이미 약혼한 사이였던 조용필이 이미숙과 스캔들이 나아 문제가 될까 봐 얼른 결혼을 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더구나 이미숙은 후에 조용필과의 관계에 대해 조용필과 나는 순수한 사랑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 혼자만의 아름다운 사랑이었던 것 같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의문과 추측들이 떠돌았던 것은 당사자였던 조용필이 당시 상황에 대해 그 어떤 이유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요.
조용필은 과거 80년대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언론이 미웠던 적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신문 잡지에서 조자만 보여도 싫어서 피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기만큼 많은 스캔들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본인 스스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어떤 기자가 본인의 스캔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자 내가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내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을 해야 하냐며 대답을 거절하기도 했는데요.
결국 그렇게 결혼했기 때문인지 조용필 부부는 결혼 이후 연애 때와는 달리 행복하지 못했는데 심지어 결혼 이튿 날부터 신혼여행도 없이 조용필이 프랑스로 공연을 떠나자 당시 두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루머와 구설수가 결혼 기간 내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신혼 초부터 시작된 해외 공연과 잇따른 방송 출연에 조용필은 늘상 바깥으로 나돌았고 어쩌다 집에 들어와도 별말 없이 밥 한 술 뜨고 다시 연습실에 틀어박혀 밤을 새우곤 했다는데요.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아내를 미치도록 외롭게 만들었고 끝내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하게 되는데 당시 보도에선 서울 동부이촌동 강변도로에서 박지숙이 로열 살롱 승용차에 탄 채 수면제와 술을 마시고 신음 중인 곳을 지나가던 승용차 운전사에 발견돼 근처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건졌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더 이상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던 두 사람은 이후 결혼 4년 만에 이혼하게 되었고 이때 조용필은 이혼의 사유가 모두 자신의 탓이라며 재산 대부분을 양도하고 원만하게 이혼하게 되는데요.
조용필은 후에 밝히길 자신이 암울했던 시절 유일한 안식처로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들었지만 본인이 오랜 무명 끝에 인기를 얻게 되자 비겁하게도 인기를 해 사랑을 버렸고 또한 대중들의 관심과 노래의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결국 그녀의 사랑마저 나에겐 부담이 되고 말았다고 털어놓게 됩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 집안에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가수가 되었고 한동안 무명 시절을 겪으며 힘겹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 성공을 지키고자 했던 의지가 강했던 것인데요.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3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조용필은 어린 시절 염전업을 하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면서 화성 최고의 부잣집 아들로 자라게 되었고 그렇게 어린 시절 금전적으로는 힘들지 않았지만 그러나 굉장히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와 잘 맞지 않아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는데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했던 아들 조용필이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방 안에서 하모니카만 불며 뒹굴고 있자 그런 아들을 보고 못난 놈이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고 합니다.
머리 길고 기타 치면 동네에서 다 불량배 같은 놈이라고 이야기를 하던 시절 조용필은 초등학교 때 대학생이던 형의 통기타로 기타 연주를 독학하더니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친구들과 합주도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그는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음악에 푹 빠져 지냈지만 집 안에서는 그런 아들의 꿈을 딴따라라며 부끄럽게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고3 때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가출까지 감행을 하게 됩니다.
조용필은 가출했다가 붙잡혀 들어가기를 몇 번을 반복했는데 처음 집을 나갈 때만 해도 본인이 평생 음악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그저 하고 싶은 음악을 했을 뿐이었다고 하는데요.
집안의 반대와 본인의 의지가 충돌하던 때의 고민은 조용필이 후에 발표한 나의 길이라는 노래 가사에서도 엿볼 수 있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음악을 하고 노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그날 내가 두 번째 길을 잃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낯선 길은 언제나 저를 유혹했고 그때마다 작은 소년은 미아가 되었습니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는 아침이 올 거예요.
어머니 그렇게 그는 고3 때 첫 밴드를 결성했고 1968년에 처음으로 무대에 서게 되는데요. 처음만 해도 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에 화음만 넣었던 조용필은 보컬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엉겁결에 보컬을 땜방으로 떠맡게 되는데 노래는 해본 적도 없는 자신이 갑자기 노래를 떠맡게 되니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은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잘하고 싶었지만 욕심만큼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하며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렇게 집을 나와 음악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결국 조용필에게도 입대 영장이 나오게 되는데 그는 아버지께는 인사를 못하고 어머니에게만 이야기하고 입대해 3주 훈련 후 방위병으로 배치가 되게 되는데요.
아버지는 조용필을 버린 자식으로 생각했지만 어머니에 알아서 해라 잘 다녀오라는 말씀에 조용필은 그때부터 부모님께서 용서를 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68년부터 미8군에서 활동을 했지만 처음 7년간은 철저하게 무명으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는데요.
이후 조용필은 75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 데이트하며 드디어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원래 나가막을 하던 그는 당시 앨범의 구색을 맞추려고 트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었지만 그 노래가 대한민국 전역을 휩쓸 정도로 큰 인기를 얻자 당시 자신이 트로트 한곡으로 졸지의 스타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만 조금 알려진 노래에 불과했지만 당시 유현종 작가라는 사람이 부산 해운대 호텔에서 기타를 치는 조용필을 보더니 너무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며 이후 조용필을 알리기 위한 대작전에 돌입하게 되는데요.
그는 이종환과 함께하는 고정 프로에서 곡을 알리는 것은 물론 방송국 작가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홍보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도 모자라 서울 곳곳에 있는 카페나 발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음반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던 중 당시 일본 제일교포대 부분이 조총련에 소속되어 있던 시절 조총련 소속이라는 이유로 추석에도 한국 땅을 밟지 못해 서러웠던 그들에게 대통령 청원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결국 재일교포들은 고향 땅을 밟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마침 그들이 들어오는 곳이 바로 부산항이었고 그때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 퍼지면서 이후 노래는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를 치니까 그 음반에 수록된 단발 머리까지 덩달아 히트를 치며 조용필의 인기는 수직으로 급상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겨울 인기 가수가 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조용필은 당시 연예계를 강타했던 약초 사건에 휩쓸리면서 청천병력 같은 활동 금지를 당하게 되는데요.
이것은 조용필이 10년 전에 한 미군의 권유로 약초를 한 번 피웠다가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들쑤시던 검사와 형사들에게 들어가게 된 것이었는데 태어나서 딱 한 번 피운 약초 때문에 그렇게 그는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하게 되지만 체혈까지 한 끝에 약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 결국 무혐의로 풀려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애반 타이반 가요계를 은퇴한 조용필은 이후 매일 밤을 술로 지새며 다시 반무대 가수로 전락해 버렸지만 이런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음악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언젠가는 다시 무대에 설 날을 기다리며 오로지 연습만을 반복한 결과 결국 이 시간들이 훗날 그의 음악적 재능을 더욱 만기시키는 계기가 되게 되는데요.
이후 출연 정지가 풀리면서 조용필은 그야말로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 그 겨울에 찾진 모나리자 급기야 본인이 너무 혼자서만 가요. 대상을 독식하자 방송사에 자신을 수상자에서 빼달라는 요청까지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이어 기자들에게 이제 tv에 그만 나가겠다고 선언하기까지 이르게 되는데요.
인기를 얻을수록 전국 노래 자랑에서도 나와달라고 할 정도로 별별 프로그램에서 다 나와달라고 요청을 하는 통에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 부탁하니까 난감했던 그는 이대로 하다가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송인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후 방송 출연을 그만두고 공연 위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또한 조용필은 80년대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 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를 많이 당하기도 했는데요.
85년에는 서울 강남의 카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 옆자리에 부산 모 호텔의 김 모 사장 일행으로부터 함께 마시자는 권유를 받았다가 거절하자 김 사장의 일행 중 한 30대 남자가 건방지라며 조용필을 마구 때리게 되었고 그렇게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어 조용필은 남서울 병원에 입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한 매체는 조용필의 아버지를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먹는 것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도 했다는데요.
이에 대해 당시 해당 기자는 대답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은 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 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조용필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 트럭을 두 대씩 사서 끌고 다니기도 했다고 하니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그는 그렇게 모든 걸 음악에 재투자했었던 것인데요.
당시 첫 번째 결혼에 실패 이후 조용필은 93년의 친누나의 소개로 미국에서 재미동포 사업가인 안진현을 만나게 되는데 이후 두 사람은 8개월간의 열애 끝에 두 번째 결혼에까지 골인을 하게 됩니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조용필처럼 재혼이었는데 당시 조용필이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그녀의 순종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하는데요. 아내는 오랜 미국 생활에도 전혀 문화적인 이질감이 없이 오히려 한국에서만 산 여자들보다 더 가정적인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천생연분이었던 아내는 후에 심장 질환을 앓다가 미국에 가서 수술까지 받았지만 이후 심장병이 급속도로 악화되며 결국 2003년에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그로부터 수년 후 mc 이금미와의 뜬금없는 스캔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하늘에 있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던 조용필은 아내 별세 당시 아내가 남긴 유산 약 24억 원에 자신의 재산까지 더해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했고
그리고 현재까지도 자신의 수익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 원씩 기부를 하고 있고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번 기부를 해 미국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에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조용필이 지금까지 기부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금액은 84억 원이지만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에 총 금액은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집 집까지 발표하면서 판소리와 파베 점목 오페라와 나의 점목 등 장르를 초월하며 끝없이 자신을 넘어왔으며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7회 매진이라는 대기록도 보유하고 있는데요.
이문세와 이승철 사이 등 대가수들도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매진을 조용필은 무려 일곱 번이나 매진시킨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조용필은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10가지 일 가운데 기뻤던 일이 한 가지라면 나머지 아홉 가지는 슬픈 일 아쉬운 일들이었다며 내가 이거밖에 안 되나라는 자책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게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인생에서 기뻤던 순간들도 있었고 이런저런 실현의 순간들도 많았지만 대한민국 오빠 부대의 시초로 어느덧 70대 중반이 된 염원한 오빠 조용필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좋은 노래를 들려주기를 바라며 가수 조용필의 인생에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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