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좋은 노래로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해 준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너무 외롭지 않게 떠나보내고 싶고 추억을 회상하며, 잠시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간은 누구나 떠날 길이기에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시간이 되기도합니다.
1970년대 인기를 끈 국민가요 흙에 살리라 를 부른 가수 홍세민 씨가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많은 사람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71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홍세민 씨의 안타까운 별세에대해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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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 살리라’ 노래의 인기
1950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동양공업전문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정두고 떠난 사람 을 부르며 데뷔했습니다. 성량이 풍부하고 외모도 준수했으나 무명 생활을 겪다가 이후 1973년 발표한 흙에 살리라 가 히트하며 인기 가수가 됐습니다. 이후 여러 곡을 발표했지만 안타깝게도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흙에 살리라 이 불후의 명곡 하나로 한평생 국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흙에 살리라 는 1970년대 산업화로 인해 고향을 떠나온 젊은이들을 위로하며 향수와 함께 묵직한 울림을 줬다 라는 평가받습니다.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는 “ 흙에 살리라 라는 노래처럼 홍세민은 흙의 소중함, 고향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다.”라면서 “시대를 함께한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가 되면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이런 상황을 담아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을 담았던 노래입니다.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힘들게 살다가 문득 고향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다가도 포근해지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던 기억들 많으실 겁니다. 바로 이 노래도 그렇게 부모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힘을 주던 노래였습니다. 현재까지도 귀향, 귀농의 주제가처럼 불리며 발표된 지 50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애창곡으로 꼽습니다.
2006년 KBS 1TV 가요무대 선정 10곡 안에 들기도 했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방송등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중학생 농부 한태웅 군이 청와대에서 열린 농업인 초청 간담회 에서 이 노래를 구수한 장단에 맞춰 불러 주목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도 예전 농촌과 많이 달라지고 있고, 농업도 과학이라고 하며 바이오 산업으로 앞으로 매우 유망한 분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농업이 없어지 지 않는 한 흙에 살리라 는 영원할 것 같습니다.
철저한 불교 집안에서 목사 탄생
그런데 홍세민 씨는 철저한 불교 집안 배경이었는데 뜻밖에 그가 나중에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여기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홍세민 씨가 지방공연 등으로 15~20일가량 장기간 집을 비우기도 하고, 그가 보증을 잘못 서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기도 하자, 그의 아내는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인의 권유로 교회를 가게 되며 종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홍세민 씨는 아내의 기독교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홍세민 씨 아버지 그리고 장인, 장모가 모두 불교를 믿는 양가 모두 철저한 불교 집안 이었기 때문에 홍세민 씨는 그런 아내의 믿음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했냐면, 아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뿐만 아니라, 친어머니한테도 같은 이유로 맞았다고 합니다. 그의 친가와 처가가 모두 불교였다는 것은 그의 결혼사진을 보면 여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결혼식 사진에는 승려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의 바로 위 친형은 스님이기도 해서 홍세민 씨는 더더욱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기독교 핍박에 견디다 못한 아내가 계속 기독교를 반대하면 이혼하겠다 라고 선포하는 바람에 이혼만을 할 수 없어서 결국 아내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홍세민 씨도 우연히 TV에서 하던 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아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의 아들은 커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심정지로 결국…
고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상황 속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가수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라고 유족은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최근 모습은 젊었을 때의 모습이랑 너무 달라져서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살도 너무 많이 빠졌고 최근에는 TV에서 얼굴을 못 봐서 그런지 연세 든 모습으로는 가수 홍세민 씨라고는 전혀 못 알아 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늘 서민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유족과 가요계 등에 따르면 고인은 2021년 11월 30일 오전 쓰러진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유족은 “아침에 갑자기 심정지 상태가 왔고 끝내 돌아가셨다. 경황이 없어 주변에만 알린 뒤 장례를 치렀다.”라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는 것이 가장 슬프다고 합니다. 좋은 노래를 선물해 주고 떠난 홍세민 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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