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미가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매장 a 씨가 발견하고 신고하였으나 이후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번 현미의 별세 소식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반년 전 배우 엄앵란과의 만남이 재조명되며 더욱 안타까운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엄앵란은 현미를 정말 좋아하고, 많은 연예인들과 알고 지내지만 현미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며 칭찬하였습니다.
오늘은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영원한 디바 현미를 추모하며, 그녀의 삶과 더불어 남긴 유산, 배신, 마지막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현미는 1938년 평안남도 당동군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녀가 13살 때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그녀의 막내 동생 둘은 북한 할머니 댁에 남게 되었습니다. 훗날 2천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될 때, 그녀는 중국 영변에서 어릴 적 헤어졌던 동생들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생들은 어릴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머리가 다 빠져있는 등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그녀는 노래 신동으로 인기를 얻고 대한민국의 대표 디바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에는 배신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인기 있어지자 그녀를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결혼하고자 했던 남자가 자신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나의 노래와 인생을 지켜주지 않았던 남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로 떠나기 전 남긴 마지막 메시지에서 “저의 노래는 평생 당신들과 함께 했던 추억을 간직하며 사랑합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녀의 삶과 노래는 많은 이들에게 추억과 위로를 전달해주었고, 이제 그녀는 우리들의 추억 속에서 영원히 빛나리라 믿습니다.
현미는 미국에서 두 달간 지내면서 겨우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21살의 나이로 덕성여대 무용과를 나오면서, 미8군 위문 공연에서 무대 무용수를 하다가 방송을 펑크낸 다른 여가수를 대신해 대타를 떼었고, 그 길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여대생 가수라는 게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금세 쇼단의 메인 가수가 되어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운명적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될 고 이봉조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봉조는 현미 월급의 반도 채 못 받는 신출내기 밴드 마스터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현미는 이봉조를 무시하기도 했고, 이봉조 역시 자신을 무시하는 현미를 못마땅해했습니다.
당시 쇼단의 단장은 쇼의 간판인 마스터와 메인 가수 사이가 틀어질까 늘 노심초사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단장은 이봉조와 현미 사이를 좋게 만들기 위해 작전을 구상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이트 클럽에 함께 데려가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서 이봉조와 현미의 관계는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현미와 이봉조의 연애는 처음에는 서툴게 시작되었습니다. 손바닥 사이에 손수건을 끼우는 것을 좋아했던 현미를 이봉조가 비웃으며 맨손으로 손을 잡았다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봉조는 춤을 잘 못 추는 모습을 보이며 현미의 발을 자주 밟았고, 그렇게 못나 보였던 이봉조가 이후로는 어딘가 순수하고 솔직한 매력을 느끼게 되어서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 쇼단에서 함께 출연하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쇼단의 단장은 이봉조를 내쫓으려는 등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시도를 해서 둘은 결국 쇼단에서 나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현미는 이봉주와 함께 1집을 작업하면서, 1962년 미국의 대가수 네킹코의 곡에 현미가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힌 그 유명한 “밤이면 밤마다”를 발표하면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냈던 현미도, 그 행복이 마냥 영원할 것만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85세의 나이로 별세하게 되었는데, 많은 팬들이 그녀의 인생과 음악, 연애를 추모하며 안타까운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 어느 날 처음 보는 여자가 현미를 찾아와 이봉조의 부인이며 딸이 두 명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현미는 이런 얘기를 듣자마자 가슴이 아프고 충격을 받지만, 이미 임신 8개월 차여서 유산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나는 모르겠다며 이봉조 씨와 얘기하라고 말한 후 그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남편 이봉조에게 달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막 따지자, 이봉조는 본초와 이미 정리를 다 했다며 이혼 서류까지 보여주면서 현미를 안심시키게 됩니다. 임신 8개월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현미는 이혼을 하게 되고, 이후 무려 8년간 본처와 현매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두 집 살림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전화한 통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짜고짜 이봉조가 지금 딸이 넷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현미는 이런 얘기를 듣자마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며, 이봉조와 이야기한 결과 본처와 이혼할 당시 딸만 둘이었다고 했는데, 이번에 전화를 한 사람은 현미의 팬인데, 현미 씨가 속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현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지만, 그녀의 인생은 이후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이 따랐습니다.
현미와 이봉조의 이별은 그야말로 막장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녀가 이별을 요구하자, 이봉주는 술을 잔뜩 마시고 흉기를 들고 와 “나는 너와 헤어지면 못 산다. 너나 나나 다 같이 이 세상을 떠나자”며 집안을 부셔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너무나도 무서웠던 현미는 추운 겨울날 잠옷 바람에 밍크 코트 하나 걸치고, 아이들을 데리고 엄횡난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봉조가 그곳까지 쫓아오면서, 이 과정에서 신성일과의 물리적 충돌까지 일어났습니다.
이후 현미는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에게 돌아가기를 요구하자, 이봉조도 미안하고 창피했는지 결국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헤어진 후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현미가 아들의 영주권을 받으러 미국에 3개월 정도 있을 때 전 남편인 이봉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는 지금 당뇨로 아파서 입까지 돌아가서 병원에 입원 중인데, 혹시 와줄 수 없냐고 말했습니다.
이 연락을 계기로 13년 만에 이봉주를 만난 현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이봉주는 수척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봉조의 체면과 인성에 빠져들어 그녀와 함께한 지 13년, 결국 이혼을 결심한 현미는 이봉조의 집안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이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다시 이봉조와 연락이 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봉조가 현재 입원 중이라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이봉조를 다시 만난 현미는 예전의 당당한 모습이 사라져 자신이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이봉조의 모습을 보면서 현미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며 어떤 이봉존대라며 땅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미는 아들을 부르기 위해 미국에 전화를 하게 되고 그녀는 이봉조가 다시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다시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며칠 후, 이봉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의 비보를 듣고 현미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봉조의 죽음으로 현미는 큰 상처를 입게 되었고, 그의 체면과 인성에 빠져들어 함께한 지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돌이켜보며 슬퍼했습니다. 불행한 이별을 겪은 그녀는 한동안 큰 아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저는 20년 동안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제가 알던 여인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요?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처지를 보면 참 안쓰러우면서도 불쌍했습니다.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합장을 승락했고,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는 아들이 사는 미국에 묻혀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현미라는 이름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이봉조와 함께 살 때, 어떤 것도 제 이름으로 되어있지 않았다며 모든 것이 남편의 명의로 돼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아이들과 맨발로 도망쳤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저에게 억울하지 않냐며 분하지 않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20년을 살았고, 두 아들을 낳았으며, 평생 부를 노래를 선물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사람을 밉게 생각해야 할까요? 오히려 그 사람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불쌍합니다. 제가 그와 헤어지고 본처에 돌아가지 않고 13년을 외롭게 혼자 살다가, 누구도 없는 곳에서 눈을 감은 것입니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제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살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불쌍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으로, 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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