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 끝내 조문 오지 않은 엄앵란 그녀의 충격적인 속사정…

현미의 장례가 마무리된 후, 현미와 친한 친구인 엄앵란이 빈소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많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현미와 엄앵란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60년 이상 지내며, 매일 아침마다 서로 전부를 이야기하는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미의 장례식에 엄앵란이 참석하지 않았을까요?

현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현미랑 나랑은 안 지나서나 낮이건 밤이건 어디를 가도 같이 다녔다. 나는 이제 친구가 없다”고 말한 엄앵란은 현미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으며, 서로 집처럼 다녔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아주 잘 알았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 관계였습니다. 엄앵란은 현미를 그리워하며 “슬프면 슬픈 대로, 미우면 미운 대로 서방 욕도 서로 하고 그랬다”며 친구의 떠남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엄앵란은 촬영 중 넘어져 무릎 수술을 받게 되었고, 목발을 짓게 되면서 거동이 불편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1년 가량 현미와 만나지 않았으며, 통화만으로 소통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거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한 엄앵란은 현미의 집을 방문하며 “4년 동안 내 집에만 있었다. 절뚝거리면서 나가면 창피했다. 편미와 같은 동네에 사는데도 창피해서 이 집을 안 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엄앵란과 현미는 매우 친한 친구로, “엄앵란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엄앵란이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까”라며 60년 우정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엄앵란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현미의 집에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습니다. 따라서 현미의 빈소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건강이 불량해진 자신이 부끄러워서였습니다. 게다가 엄앵란이 다리를 다치지 않았더라도, 수년 전 남편이 떠난 데 이어 매일 통화했던 가장 친했던 친구마저 떠나면서 큰 상실감과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곁에는 아무도 없이 자신만이 홀로 남아 인생의 종착점에 다가가고 있는 상황에서 절친의 빈소가 펼쳐진 광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아 건강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엄앵란의 이름은 처음 듣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만나자마자 “뵙네요”라는 인사와 함께 “저 언니할게요”라며 첫 만남을 기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6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현미와 엄앵란은 모두 남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했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60년에는 엄앵란이 주연한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신성일을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그 때는 이미 톱스타였던 엄앵란과 첫 촬영이라 감히 어앵란에게 말도 못 붙였던 신성일이었는데, 엄앵란은 그를 ‘미스터 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엄앵란은 너무 지쳐서 촬영 스케줄을 못 이행할 뻔했는데, 그때 신성일은 일부러 다친 척을 해 엄앵란을 쉬게 해주려고 촬영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의 배려와 관심을 나누다보니 둘 사이에 로맨스가 생겨 결국 엄앵란과 신성일은 결혼하게 됩니다. 병문안을 가던 중 병실에서 신성일이 링거를 꽂은 채 엄앵란에게 윙크를 날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엄앵란은 자기 남편이 죽은 지 49일도 안 돼 전화를 거는 부잣집 며느리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반면에 신성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과거에 예대인이었던 동화 방송 아나운서 김영애와의 외도를 공개하면서 엄앵란에게 여자가 밖에서 헬렐레에 보이면 안 된다며 찍소리도 못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밖에서 여자들과 놀아다녔다고 합니다.

신성일은 과거 돈을 잘 벌어 갖다 주기는 했지만 이후로는 엄앵란의 말을 안 듣고 자기가 하는 일마다 다 망하게 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난리를 쳤다거나, 극장을 사서 폐업시켰다는 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평극장을 샀을 때는 엄앵란에게 표를 받으라고 시켜서 매표소에서 표까지 팔게 했다고 하네요. 엄앵란은 그때를 회상하며 자신이 배우가 아니라 무릎 찌르면 무룽치고 때 타면 떼 닦는 걸레와 같았다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신성일과 이혼하지 않았고, 남편의 길을 평생 살아가며 바보처럼 살았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엄앵란은 남자들이 여자 연예인을 단순한 대상으로 대우하는 것에 반발하여, 연예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대학교에 진학하여 졸업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그녀는 여성 연예인으로서 대학 졸업자임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엄앵란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신성일과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엄앵란의 아버지는 섹소폰 연주자이고 어머니는 배우였던 바람에 딴따라 자식이 이혼할 줄 알았다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엄앵란은 부모님의 걱정을 이해하고 그들이 듣기 싫어할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엄앵란은 신성일과 결혼 후에는 가정주부로 살며, 딸인 일라미녀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집안일을 전담했습니다. 그녀는 신성일과의 이혼을 결코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님의 걱정이었습니다.

엄앵란과 신성일은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부모였지만, 부부 사이에서는 신성일의 바짓바람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엄앵란은 신성일의 외도 고백과 여자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와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위해 이혼을 하지 않았고, 결혼 이후에는 주부로 살면서 가정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앵라나 한 번만 살려줘라는 제안을 받고 출연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영화에 나와도 그저 극장 운영자에게 사례받으며 살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신성일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가정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자녀들의 교육도 철저히 챙겨주는 등 자상한 부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신성일과 엄앵란 부부는 부자 가정이라는 것이 큰 이유로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 간에 거리가 벌어지면서 싸움도 많았습니다.

엄앵란은 연예인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숙명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 여자 연예인들을 다방마담처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싫어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친정 부모님은 신성일과 딸의 결혼을 처음에는 반대하셨으며,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또한 신성일은 자식들을 아끼며 자상한 아버지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인에게는 매우 엄하게 대하면서 자주 다투기도 했습니다. 엄앵란은 신성일이 자신을 너무 엄하게 대하는 것을 참아내지만, 때로는 약이 올라 남편의 혁대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성일은 엄앵란의 건강 관리와 식습관 등에 대해 자주 지적하며, 서로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매우 다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들 부부는 결혼 생활에서 서로의 차이점과 갈등을 극복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나가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엄앵란은 자식들과의 이별이 너무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참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참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유명한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남편과 이혼했을 것이라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이 100번 이상 이혼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자식들과 여동생이 엄앵란을 설득해 이혼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지켰다고 합니다.

그나마 엄앵란은 10년 전 배우 이경영이 준 유기견 싱싱이와 함께하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싱싱이가 남편보다 좋다며 자신이 넘어질 때는 불이 나게 달려오는 반면, 신성일은 자신이 아프면 빨리 병원에 가라며 틱을 내뱉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던 시기에는 걸쩍이 있는 모습이 너무 싫다며 여러 가지 계집질을 하며 밖으로 나가기도 했고, 엄앵란이 남편을 돌보던 도중에 자꾸 찾아와 불러대기도 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당시 신성일은 화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엄앵란은 걸음이 절뚝거리며 화순까지 나가는 것도 참으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신성일의 마지막 장례식에서 엄앵란은 아들과 함께 남편을 떠나보내는 슬픈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전에는 싸우기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엄앵란이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았을 때에도 신성일은 휠체어를 밀어주고 진찰할 때 일일이 따라다니며 보호자 노릇을 해주는 등 극진히 보살펴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참 보기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성일은 아내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딸에게는 “너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는 말했지만, 아내에게는 그런 말을 아껴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엄앵란은 “그저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시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신성일이 술을 마시고는 자기 맘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엄앵란이 한 말이었습니다.

엄앵란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이 겪은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며, 그것들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성일이 순종하고 순백한 여자를 만나라고 말한 것에 대해 엄앵란은 자신은 장작처럼 다 태우고 헌신하며 군불 지피면서 몸표를 불피우고 가마솥도 데워 누룽지와 메주도 쑤는 장작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신성일의 장례식에서는 엄앵란이 남편이 목에 둘러놓고 있던 실크 스카프와 실내화만큼은 그 이의 채취를 느끼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았다는데요. 하지만 추도식에서는 나중에 자신도 남편 옆에 나란히 묻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전에는 남편과 함께 묻히자는 제안에 대해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례를 치르고 보니 신성일과 엄앵란은 대중 때문에 먹고 살았던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따로 묻히겠다는 것도 대중을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결국 옆자리로 몇 자리를 정해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2022년 4월 9일, 배우 엄앵란의 남편 신성일씨가 별세하였습니다. 86세의 나이에 별세한 그가 오랜 기간 엄앵란과 함께한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엄앵란의 삶은 항상 쉽지 않았습니다. 배우로서의 경력과 함께 집안에서의 가정적인 문제들과 남편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힘내며 이겨냈습니다.

신성일의 별세 후, 엄앵란은 그의 뒤를 따르지 않고 남아있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이전에도 자신의 삶이 그녀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아프고, 현미라는 절친의 별세로 인해 더욱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항상 살아오면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신성일과 현미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추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번에도 힘내서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그녀를 응원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