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마저 잃어버린 가수 송창식… 결국……

개성적이면서도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 송창식 씨는 자기의 곡 대부분을 직접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입니다. 한국 가요사의 굵은 획을 그은 천재로 남을 가수이자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한 평생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슬퍼도 웃으면서 희로애락 등 모든 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하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웃음은 울음을 뛰어넘은 웃음입니다.

오늘은 그의 웃은 뒤에 가려진 인생사에 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에서 송창식 씨의 웃음에 가려진 그의 인생사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긴 글이니 시간 나실때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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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송창식 씨는 1947년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그가 3~4살 무렵 한국전쟁 중 전사하셨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 행상을 다녔던 어머니는 송창식 씨가 7살 무렵, 그를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가출해서 행방불명되고 말았습니다.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해 동네북처럼 얻어맞는 신세가 되어 온 동네를 울면서 돌아다녔던 어린 송창식은 울보 대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낯선 어른이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에 온통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후 막내 삼촌을 졸라서 마련한 하모니카는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하모니카로 못 부는 곡이 없게 되자, 동네 소문이 자자하게 났고 미군들에게도 코리안 보이로 인기를 끌며 초콜릿을 얻어먹기도 합니다. 인천 신흥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에 취미를 붙이고 오락 시간에는 하모니카도 불고, 오르간을 더듬더듬 치며 노래도 부르면서 친구들한테 인기도 높아졌습니다. 음악책을 보면서 가사로만 노래를 부르기 지겨워 도레미 등 음정으로 부르다 보니 음계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8~9살 무렵에는 한마디로 그는 음악 천재였으며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는 지휘자를 보고 지휘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고, 토스카 오페라 영화를 보고 성악가를 꿈꾸기도 했었습니다. 실제로 중3 때 경기 음악 콩쿠르에서 성악 부문 1등을 하며 놀라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방황

그러나 음악에 대한 재능만큼이나 예민한 감수성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가출하게 만듭니다. 어머니가 있다고 하는 서울 영등포 정릉 등을 며칠씩 헤매다가 허탈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공부를 잘해 집안 어른들은 당시 인천 최고의 명문 제물포고를 지원하라고 했는데 이를 거역하고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합니다. 그러나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으로는 개인 레슨비를 낼 수 없어, 결국 성악을 포기하고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좀처럼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인데 이때 죽을 만큼 괴로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꿈을 포기 당한 그는 또다시 가출해서 떠돌이 같은 생활을 하며 끝없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잡일을 하며 동가식서가숙하며 지냅니다. 그러다 결국 거지,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실은 거지보다 더 못한 거지가 되어 거지들에게서조차 쫓겨나고, 서울역에서 노숙자로 추운 겨울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무려 2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친구들의 여행에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그의 앞길을 열어줄 단초를 만나게 됩니다. 대학생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놀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때 난생처음 본 기타라는 악기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대학생은 바로 서유석 씨였습니다.

목공소로 달려가 엉성한 소리를 내는 기타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밤낮없이 기타를 치며 독학했는데, 그렇게 기타는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여기저기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주며 식사를 해결했고 친구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친구들한테 밥을 얻어먹으려고 홍대, 서울대를 밥 먹듯이 다녔다고 합니다. 그 당시 친구 염동진 씨가 홍대 미대에 다녔는데 그의 수업까지 같이 들어가 강의도 듣고 교정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운명의 서막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전환점 ‘쎄시봉’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무교동의 유명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MC를 맡았던, 당시 홍대 공예과 2학년 이상벽 씨는 쎄시봉 출연을 교섭해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송창식 씨는 “밥 먹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쎄시봉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조영남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에 송창식 씨는 이러했습니다. “송창식 씨가 아주 남루한 거지 같은 차림을 하고 나타났는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이 딱 벌어졌다고. 마침내 노래의 신선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송창식 씨는 기타를 치며 가곡을 불렀습니다. 자기 신세와도 같은 노래의 제목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습니다. 계속해서 조용남 씨는 이렇게 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송창식한테는 노래만이 유일한 언어였다. 그는 애당초 외계인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통상적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 패거리가 몇 년을 거의 매일 함께 밥 먹고 잠자면서 붙어 다녔지만, 그의 정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어봤자 딴소리할 게 뻔하니 아예 묻지도 않았다.” “부모가 살아계신 지 형제가 있는지, 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잃어버렸다던 엄마와 누이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모든 게 안갯속이었다.”

그러던 송창식은 자신과 전혀 다르게 생겨 먹은 귀족적인 친구와 만나 팀을 이뤘다. 경희대 초대 학장님의 아들이며 전설적인 민족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인 윤형주와 불멸의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최고 스타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트윈폴리오 결성과 해체

67년 윤형주 씨와 남성 듀오 트윈폴리오를 결성해서, 68년 지금껏 애창되는 하얀 손수건 등 주옥같은 번안곡들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2년 남짓 활동한 트윈폴리오는 윤형주 씨가 미국 유학을 하게 되어 팬들의 아쉬움 속에 1969년 12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솔로 데뷔

1971년에는 창 밖에는 비 오고요를 발표하며 솔로 가수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러다 27살 때 병무청에서 7개월 방위복무를 했는데, 그때 미군 방송에서 흑인 아마추어 노래경연대회를 참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아마추어 경연대회이었는데 자기보다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폭풍 눈물을 흘립니다.

울다, 울다 지쳐서 넋이 반은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또 TV에서 전주 대사습놀이를 보는데 거기에 나온 장원과 차석이 또 자기보다 훨씬 잘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울지 않고 본격적인 분석을 시작합니다. 서양 음악과 국악을 분석해 자기만의 음악 이론을 만들었고 동양과 서양의 요소가 모두 있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해 충격적인 음악들이 탄생합니다.

그의 음악

그 당시 나온 노래들이 1974년에 피리 부는 사나이, 다음 해인 1975년에 고래 사냥, 왜 불러 이런 곡들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가요 부문에 여러 가지 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1978년부터 3년 연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받게 됩니다.

이때 발표된 곡으로는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등입니다.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가수들조차도 그의 노래 실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그가 들려준 서정적이고 신명 나며 자유로운 노랫가락들에 억눌려 지냈던 70년대 많은 젊은이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1980년에는 가나다라로 가요의 국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더욱 본격적으로 했으며 미성이었던 목소리도 몸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한을 표출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단전호흡과 도가사상에 빠져들며 화엄사로 들어가 독신 수도 생활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송창식 씨는 서양의 달콤한 곡을 흉내내던 데뷔 시절의 음악에서 탈피해서 도가사상과 우리 가락의 심취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1986년 발표된 ‘참새 하루’와 ‘담백하게 아가씨’를 더블 타이틀로 한 앨범도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외에도 ‘상아의 노래’, ‘내나라 내겨레’, ‘밤눈’, ‘맨 처음 고백’, ‘딩동댕 지난 여름’, ‘우리는’ 등의 히트곡이 있으며, 서정주 시인의 시로 만든 ‘푸르는 날; 등 명곡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신곡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포크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걸어온 그의 음악 세계는 성악, 팝송, 포크, 트로트에서 국악적 요소가 녹아든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실로 형형색색이었습니다.

그의 결혼

정상의 인기는 끊이지 않는 구설수와 당시 최고의 인기 탤런트 한혜숙 씨 등 여러 유명 여성 연예인들과의 염문설도 동반했습니다. 그러다가 77년 9월, 고교 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 쌍둥이 동생 한성숙 씨와의 결혼으로 송창식 씨는 안정을 찾은 듯 보였습니다. 과연 그러했을까요?

그의 수십 년 지기 친구 조영남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어렵게 공부하다가 방학 때 돌아오면 떡 벌어지는 귀국 파티로 반겨준 것도 바로 송창식 부부였다. 악기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그의 집에는 나는 처음 보는 온갖 전자 악기들이 널려 있어 기가 죽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 돌아오자 송창식의 행방이 묘연했다. 간신히 수소문해 보니, 어느 레코드사 사장실 한쪽에 야전 침대를 들여놓고 두문불출 틀어박혀 있었다. 아내가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했다며 묻지도 않는 내게 덤덤하게 말했다.”

이 후 송창식 씨는 한 방송에 출연해 “아내는 사업을 한다며 그의 곁을 떠나 20년이 넘도록 별거하고 있고 1년에 1~2차례 만난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은 “가정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며 가사에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내가 떠났다.”라고도 말했습니다.

슬하의 자녀는 2남 1녀. 첫째 아들 송결 씨는 친자식이고 나머지 두 남매는 입양하였습니다. 미국에 사는 쌍둥이 언니인 처형이 난임으로 한국 아이를 원해서 입양했는데 당시 관련 법규가 변경돼 입양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자기가 입양했고 또 한 아이는 언니가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낳은 아들인데 언니가 키울 형편이 못 되자, 자기가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아내의 사업 실패 외에도 돈도 많이 빌려주고 빚보증도 많이 사주었는데 제대로 받은 게 없고 받을 생각조차 없어 많은 재산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저작권료가 만만치 않게 들어와서 생활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저작권료가 1억 정도 그리고 공연으로 1억 정도가 들어와서 매년 2억 정도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업한다고 저작권료 1억 정도를 다 갖다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돈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

그런데 왜 천재 작곡가는 작곡을 그만두어 버렸을까요? 90년대에 접어들자, 음악 소비자 세대가 나이가 어린 사람들로 바뀌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10만 장만 음반이 팔려도 그 당시 사람들의 경제 형편으로는 대박이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자 100만 장씩 파는 후배들이 나왔으며 20만 장이 팔려도 손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음악으로 제작자에게 이익을 주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작곡을 중단하며 가장 전성기에 사라져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30년 넘게 신곡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만들기만 하고 발표하지 않은 미발표곡이 1,000여 곡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안타까운 고백을 합니다. 또 하나의 발목이 그를 잡아 신곡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1976년에 이어 2017년 두 번째 성대 결절 수술을 받은 그는 성대를 수술한다라는 것은 그동안 닦았던 목소리 자체를 잃는 것이라 정의한 뒤 “수술 후엔 다시 발성을 익히고 연습해서 목소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만든 목소리는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습니다. 2020년 한 라디오 방송에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 함춘호 씨와 함께 출연해 공연했습니다.

그때 아직도 신곡을 내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올해 어떻게 신곡 나오나요?” “내가 제일 하고 싶어요. 일단 난 이 목이 좀 나아야 해요. 왜냐면 몇 년 전에 성대 수술을 했어요.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줬는데 그 컨트롤하는 능력이 없어졌어요.”

송창식 특유의 고래 같은 노래 느낌은 여전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의 성대 결절 수술은 그의 목소리를 많이 앗아간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목이 온갖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위대함과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듯이, 거장의 모습 또한 그러했습니다. 데뷔한 지 무려 50여 년이 넘는 가수지만 매일 1시간씩 발성 연습 또 한 시간은 기타 연습에 매진한다고 합니다.

“인생 모든 것의 기초가 가장 중요하며 아무리 높은 경지에 올라도 기초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음악의 기초를 닦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며 마치 구도자가 도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음악을 통해 수련하는 셈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인기나 돈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정진하며 수련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저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